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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33 기준 최신판



구들장을 깔고 화기(火氣)가 방 밑을 통과하여 방을 덥히는 장치.

개설

온돌(溫突) 또는 온돌(溫堗)은 불을 때는 아궁이와 난방을 취하는 구들, 연기를 배출하는 굴뚝을 갖춘 난방 방식을 말한다. 한옥은 온돌과 마루라는 이질적 요소가 하나의 평면 안에 있는 것이 특징이다. 온돌은 북쪽 추운 지방에서부터 발달하여 따뜻한 지역으로 내려온 것이고, 마루는 남쪽 더운 지방에서 시작하여 추운 지역으로 올라간 것이다. 두 이질 요소가 만나 여름과 겨울을 동시에 날 수 있는 특수한 한옥 형태가 만들어졌다. 따라서 온돌은 겨울 공간이라고 할 수 있고, 마루는 여름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툇마루 등 완충 공간이 연결되어 이중 평면 구조의 한옥이 탄생하게 되었다. 온돌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는 고래가 한 줄이었다가 차츰 수가 늘어났으며, 고려중기에 이르면 방 전체에 구들을 들이는 전면 구들 방식이 채용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따라서 온돌의 시원은 고대까지 올라가지만, 지금과 같은 온돌의 전형은 고려시대 정도로 볼 수 있다.

내용 및 특징

고래에 불을 넣기 위하여 불을 지피는 곳을 아궁이라 한다. 아궁이는 화구(火口) 또는 돌구(堗口)라고도 한다. 난방을 위한 노(爐)와 취사를 위한 부뚜막이 분리된 형태는 청동기시대 움집에서부터이다. 그러나 철기시대부터는 긴 고래가 보급되면서 고래 한쪽에 아궁이를 두어 불을 지피면서 솥을 걸어 취사를 겸하게 되었다. 아궁이 위쪽에 평평하고 넓은 대를 만들어 취사 및 조리 공간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를 부뚜막이라고 한다. 살림이 커지면서 부뚜막은 더 넓어지고 길어지면서 부엌에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조리 공간이 되었다.

함경도처럼 추운 지방에서는 부뚜막이 더욱 넓어져 하나의 실(室)이 되었는데, 이를 정지라고 한다. 정지와 부엌 공간은 벽 없이 하나로 트여 있으며, 추운 지방에서는 다용도실 기능을 하는 유용한 공간이 되었다. 따라서 정지는 부엌을 대신하는 대명사로 널리 쓰이게 되었다. 아궁이는 불을 때고 남은 재를 계속 긁어내야 한다. 겨울에는 불씨가 남은 재를 화로에 담아 방 안에서 난방으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다 사용한 재는 잿간에 모아두었다가 인분 등과 섞어 거름으로 썼다. 따라서 잿간과 측간은 같이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았으며, 재의 탈취 성능 때문에 측간 냄새가 줄어드는 효과도 있었다.

부엌이 따로 없는 사랑채나 건넌방, 행랑 등에서는 부뚜막을 만들지 않고 아궁이만 만들었다. 때로는 벽체에 구멍만 내어 아궁이로 사용하였다. 이를 함실에 바로 불을 지핀다는 의미로 함실아궁이라고 한다. 함실은 고래가 시작되는 부넘기 앞에 만들어지는 불을 지피는 공간을 말한다. 함실아궁이는 정자나 살림을 살지 않는 서원 및 향교 등에서 많이 볼 수 있다.

고래는 아궁이에서 지펴진 불길을 굴뚝까지 유도하는 통로이다. 고래는 고래바닥과 고래둑, 구들장으로 만들어진다. 고래바닥은 고래를 만드는 바닥으로 아궁이에서 윗목 쪽으로 가면서 조금씩 높게 경사지게 하여 불길이 잘 들어가도록 한다. 아궁이와 고래바닥 경계는 둑처럼 약간 높여주는데, 이를 불목 또는 부넘기라고 한다. 불목은 고래에서 개자리로 넘어가는 곳에도 설치한다. 고래바닥에는 골을 만들기 위하여 고래둑이라는 둑을 쌓는다. 고래둑은 고래 양쪽 측벽이 되는 것으로 보통 잔돌을 흙과 이겨 빈틈없이 쌓으며, 드물게는 불길이 고래를 서로 넘나들 수 있도록 트여놓기도 한다. 이를 허튼고래라 한다.

고래는 굴뚝 위치와 모양에 따라 여러 가지가 있다. 가장 일반적인 형태는 아궁이와 굴뚝을 반대편에 놓고 고래를 직선으로 놓는 줄고래이다. 때로는 고래를 부챗살처럼 놓는 경우도 있는데, 이를 부채고래라고 한다. 그리고 아궁이와 굴뚝을 모서리에 설치하고 대각선으로 관통하면서 부챗살처럼 생긴 맞선고래가 있다. 굴뚝이 측면에 오는 경우는 고래가 ‘ㄱ’ 자로 꺾여 설치되는데, 이를 구분고래라고 한다. 그리고 아궁이와 굴뚝이 같은 쪽에 있어 고래를 타고 들어간 불이 한 바퀴 돌아 나오게 놓은 고래를 되돈고래라고 한다.

고래둑 위에는 판석으로 구들을 완성하여 구들장을 놓는다. 구들장 위에는 연기가 새어 나오지 못하게 진흙을 물에 개어 빈틈없이 바르며 그 위에 장판지를 깔고, 장판지는 콩댐 등으로 마감하여 방바닥이 된다. 구들은 구들장을 데워서 돌의 잠열을 이용하는 난방 방식으로 구들장의 선택이 중요하다.

아궁이 쪽 함실은 불이 직접 닿는 곳으로 매우 뜨겁다. 그래서 이곳에는 특별히 두껍고 큰 것을 사용하는데, 이를 불목돌이라고 한다. 그리고 고래가 모아지는 윗목이나 측면에는 고래보다 깊은 줄 웅덩이인 개자리를 만든다. 개자리는 뜨거운 공기가 고래를 통과하면서 식어 공기 중에 섞여 있는 그을음이나 찌꺼기를 떨어트리는 곳이다. 그래서 구들을 오래 사용하면 정기적으로 뜯어 개자리의 찌꺼기를 제거하여 준다.

고래를 빠져나온 연기는 굴뚝을 통하여 공기 중으로 배출된다. 이때 개자리와 굴뚝을 연결하는 통로를 연도(煙道)라고 한다. 연도의 길이는 자유롭게 정할 수 있기 때문에 굴뚝의 위치 역시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다. 궁궐에서는 굴뚝이 침전과 꽤 먼 거리에 떨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경복궁은 아미산에 굴뚝을 세우고 연도를 길게 연결하였다. 연도는 땅속에 묻히기 때문에 물이 스며들어 막히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 한다. 굴뚝은 후원의 조경 요소로서도 중요한 구실을 한다.

굴뚝은 아궁이에서 발생된 연기가 최종적으로 배출되는 곳이면서 아궁이의 불을 빨아들이는 기능을 하는 것으로 빈틈없이 잘 만들어야 불이 잘 든다. 구들이 설치되는 곳에는 반드시 굴뚝이 있어야 하는데, 온돌이 발달한 우리나라는 굴뚝도 다양하게 발달하였다. 온돌이 없는 일본은 굴뚝을 전혀 찾아볼 수 없으며, 캉이라는 침대형 구들을 사용하는 중국에서는 우리처럼 발달된 굴뚝을 좀처럼 보기 어렵다. 굴뚝은 대체적으로 추운 북쪽 지방이 높고 남쪽으로 갈수록 낮아지다가 제주도에 이르면 사라진다. 추운 지방에서는 불을 강하게 빨아들여야 하기 때문에 굴뚝을 높게 설치한다. 남쪽 지방에서는 기단에 구멍을 뚫어놓는 정도로 굴뚝을 설치한 예도 볼 수 있으며, 충청남도 아산시 외암리 민속 마을 참판 댁에서는 전면 기단에 굴뚝을 두어 여름에는 이를 개방하여 모기를 쫓는 용도로도 사용하였다.

변천

원시시대에는 움집 가운데 ‘노’를 두고 난방과 취사 및 조명을 하였다. 청동기시대에는 난방을 위한 노와 취사를 위한 부뚜막이 분리되어 설치되었다. 초기 철기시대에는 오늘날 같은 온돌의 원초 형태라고 할 수 있는 고래식 구들이 나타났다. 사례는 경기도 수원시 서둔동 움집터에서 발견되었으며, 평안북도 영변의 세죽리 유적과 노남리 유적에서는 ‘ㄱ’ 자 고래구들이 발굴되었다.

역사시대에 들어서도 방 전체에 구들을 들이는 전면 구들 방식은 나타나지 않았고, 벽을 따라 ‘一’ 자나 ‘ㄱ’ 자 형태의 구들을 부분적으로 들인 줄고래가 있었다. 초기에는 외줄고래이었다가 차츰 줄 수가 늘어나 쌍줄고래, 세줄고래로 변하였다. 고구려 동대자 유적이나 발해 상경 용천부 서구 침전 터 등에서 볼 수 있다. 고려중기 이후에는 방 전체에 구들을 들이는 것으로 발전하여 현재에 이르렀다.

전면 온돌은 서민들에게서 시작되어 차츰 양반 주택에 보급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양청(凉廳)과 욱실(燠室)을 두어 생활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욱실이 지금의 온돌이다. 고려시대 문집류에는 양반들은 집에 욱실을 두어 노약자나 비상시에 사용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이로 미루어 구들은 고려시대 초기까지도 양반집에서 일반적으로 채용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연기가 많이 나기 때문에 서민 주택에서 먼저 사용하다가 차츰 양반 주택에 보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최근에 발굴된 조선초기 유적인 회암사지에서는 전면 온돌이 대량 발굴되었는데, 이로 미루어 고려중기 정도부터는 전면 온돌이 양반집에도 보편화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중국 『신당서』 「고려조(高麗條)」에서는 “고구려 사람들은 장갱(長坑)을 만들어 난방한다.”라고 하였다. 고려시대 『고려도경』 28권 「와탑(臥榻)」조에서는 “서민들은 구멍이 있는 흙침대를 만들어 화갱(火坑) 위에 눕는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갱(坑)은 중국의 침대식 난방인 캉을 의미하는 것으로, 한쪽에 화구가 있는 줄고래를 의미한다.

1254년(광무 8) 발간된 최자(崔滋)의 『보한집(補閑集)』에서는 갱을 돌(堗)로 표기하였고, 화구를 돌구로 썼다. 『고려사』에서는 『조선왕조실록』과 같이 구들 들인 방을 욱실, 마루 칸을 양청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기록으로 미루어 줄고래와 구들장으로 만들어진 구들은 고려중기 이후부터 일반화되었고, 그 이름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온돌이라고 불렀을 것으로 추측된다.

의의

온돌은 아궁이에 불을 때서 구들장을 데워 난방을 취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피부와 닿는 느낌이 좋고 돌과 진흙에서 나오는 원적외선은 건강에 도움이 된다. 또 아랫목과 윗목이 있어 방 안에서도 온도 차이에 따른 대류 현상의 유도로 쾌적한 거주 조건을 만들 수 있다. 또 가족이라도 체온이 다르기 때문에 아랫목, 윗목 등 공간 이용을 효율적으로 할 수 있는 유용한 난방 방식이다. 다만 나무를 때기 때문에 연료 공급의 문제가 있으므로 변화하는 미래 연료에 적합하면서 전통 구들의 장점을 살린 현대화된 구들 개발이 시급하다.

참고문헌

  • 김왕직, 『알기 쉬운 한국건축용어사전』, 동녘, 2007.
  • 김준봉, 『온돌 그 찬란한 구들문화』, 청홍, 2006.
  • 장경호, 『한국의 전통건축』, 문예출판사, 1992.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편찬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