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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31 기준 최신판



노역의 대가로 지급되는 삯.

개설

역가(役價)란, 대체로 노역의 대가로 지급되는 삯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고려시대이래 주현에서 해마다 바치는 공부(貢賦)를 대신하는 대역가(代役價)를 지칭한 경우도 있었다.

공부를 대신해 바치는 역가는, 대동법 실시 이전에는 결당 포 5~10필에 달하였다. 대동법이 시행되기 전까지 역가는 꾸준히 증가하여 쌀 70말[斗]에 달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의미의 역가는 대동법의 시행과 함께 대동미에 포함되었다.

노역의 대가로 지급되는 역가는, 16세기 신역(身役)이 포로 납부되는 추세 속에서 특정 역에 고용된 장인 등에게 지급되기 시작하였다. 17세기 초엽에는 기존의 요역제를 대신하여 모군 등을 고용하여 품삯[雇價]을 지불하였다. 이처럼 신역과 요역을 점차 현물로 납부하게 되면서 노동력이 부족해졌는데, 부족한 노동력을 채우기 위하여 고용한 장인과 모군 등에게 지급하던 삯을 역가라 칭하였다.

내용 및 특징

경아전(京衙前) 중 서반아전(西班衙前)에 속하는 조예(皂隸)·나장(羅將)의 경우, 16세기부터 대립(代立)하는 현상이 보편화되었으며(『중종실록』 3년 10월 19일), 16세기 후반에는 고립제(雇立制)가 적용되었다. 대동법이 시행된 이후 조예·나장의 역가는 대동세의 지출 항목에 포함되었다. 16세기부터 장인의 신역이 납포제(納布制)로 바뀌면서, 관부에서 기술 노동력이 필요할 때 장인을 고용해 쓰는 일이 많았다. 이와 같은 장인들에게 지불한 급료 또한 역가의 형태를 취하였다.

17세기 이후 호역(戶役)·결역(結役)의 형식으로 징수되던 군현의 잡역세(雜役稅)는 관수(官需)의 각종 잡물을 마련하는 데 쓰였다. 한편으로는 각종 역사에 필요한 노동력을 조달하는 데에도 쓰였다. 잡역세는 지방군현에서의 정기·부정기적인 역가 지출 재원이었다.

역가는 본래 민간의 요역 노동을 대신해서 노역을 수행하는 자에게 지불되었다. 예컨대 대동법 시행 이후 선공감(繕工監)공안(貢案)에 보면, 갈대를 베는 예취군(刈取軍)의 역가를 비롯하여 이를 실어 내는 부출군(負出軍)의 역가 등도 지출 예산 항목에 포함되어 있다. 이전에 요역 종목에 포함되어 있던 것을 대동미 상납분의 용도로 지정한 것이었다. 중앙과 지방의 토목 공사에 모군을 고용하고 이들에게 역가를 지불한 것도 요역 노동을 대신한 노동력 구매의 성격을 지녔다.

조예·나장·장인 등에게 지불한 역가는 종래 신역에서의 부역 노동을 대신한 대가였다. 반면에 중앙이나 지방의 역사에 고용된 일꾼들이 받는 역가는 요역에서의 부역 노동을 대신한 대가였다.

조선후기의 각종 토목 공사에 고용된 장인·모군 등이 받는 역가는 양식[役糧]과 품삯으로 주는 포[雇布]로 구성되어 있었다. 공사 기간 중에 소모할 요미(料米)로서의 미곡과 가포(價布)로서의 포목을 함께 아울러서 모군의 고가로서 지급하였던 것이다. 예컨대 18세기 초 산릉역(山陵役)의 모군들이 받는 1개월 품삯은 일반적으로 쌀 9말[斗], 면포 3필이었다. 우하영(禹夏永)은 『천일록(千一錄)』에서 역부(役夫)의 하루 품삯은 25문[2전(錢) 5분(分)]이며 이것은 ‘널리 통행되는 예규’라고 해서, 18세기 후반 날품팔이의 일당(日當) 수준을 지적한 바 있다.

변천

토목 공사 등에 고용된 장인과 모군들의 역가는, 대개 작업한 날의 수효에 따라 지급되었다. 처음에는 쌀과 면포를 현물로 지급하였으나, 18세기 후반에 이르면 점차 화폐로 지급하였다. 아울러 노동력의 수요와 공급 사정에 따라 역가가 조절되었다.

참고문헌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강만길, 『조선시대상공업사연구』, 한길사, 1984.
  • 윤용출, 『조선후기의 요역제와 고용노동: 요역제 부역노동의 해체, 모립제 고용노동의 발전』,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8.
  • 이정철, 『대동법, 조선 최고의 개혁』, 역사비평사,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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