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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30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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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식물원 |
한글표제 | 식물원 |
한자표제 | 植物園 |
관련어 | 관광(觀光), 궁내성(宮內省), 동물원(動物園), 수정궁(水晶宮), 어원(御苑), 어원사무국(御苑事務局), 여가(餘暇), 온실(溫室), 원유회(園遊會), 이왕가(李王家), 이왕직(李王職),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창경궁(昌慶宮), 창경원(昌慶園), 춘당지(春塘池), 탐승회(探勝會) |
분야 | 생활·풍속/풍속/놀이 |
유형 | 개념용어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대한제국기~일제강점기 |
집필자 | 정욱재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식물원(植物園)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순종실록』 2년 11월 1일 |
일제가 조선 황실의 대외적 이미지를 격하시키고 전통적 궁궐을 왜곡시키고자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개칭한 후 조성한 식물원.
개설
창경궁(昌慶宮)은 창덕궁의 이궁(離宮)으로 건국 초부터 역대 국왕과 왕비들이 거처하던 유서 깊은 궁궐이었다. 일제는 조선왕실의 역사와 전통이 상징적으로 배어 있는 창경궁을 공원화하여 정치적 이미지를 격하시키고자 하였다. 특히 식물원은 조선왕조 궁궐 전각들과는 확연히 비교되는 목조 유리 건물로 지어져 조선과 일본이 전근대와 근대, 비문명과 문명이라는 구도로 비추어졌다. 특히 1910년대에 순종이 기거하던 궁궐 인근에서 관광을 한다는 발상 자체가 조선왕실의 역사적 상징성을 훼손하고 부정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내용 및 특징
1907년(광무 11) 고종이 헤이그특사를 파견한 것을 빌미로 일제는 순종에게 강제 양위를 하도록 억압하였다. 일제는 내각은 물론 궁내부 관제도 변경하여 각 차관을 일본인이 임용될 수 있게 하였다. 이른바 차관정치를 개시하면서 궁내부 차관에 고미야 사보마츠[小宮三保松]를 임명하였다. 고미야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최측근으로 박물관, 동물원, 식물원에 대한 사무를 관장하는 어원사무국(御苑事務局) 총장을 겸임하였다.
창경궁 내 동물원과 식물원의 설치는 표면적으로는 이완용(李完用)의 주청에 따라 순종이 재가한 것이었지만 그 배후에서 창경원 조성을 기도한 것은 이토 히로부미였다. 이토는 대한제국 황실의 위락과 위엄을 위해 어원(御苑)을 시설한다고 하였으나 1909년(융희 3) 11월 1일부터 일반 공개를 하였으며 곧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개칭하였다(『순종실록』 2년 11월 1일). 역대 조선왕조의 궁궐 공간을 유원지로 만든 의도는 조선왕조의 몰락과 일제의 이미지를 홍보하는 수단이었다. 따라서 창경궁에 동물원을 설치하여 순종 및 황실을 위한다고 한 것은 명분이었고 대외적으로 대한제국 황실의 위엄을 격하시키려는 의도에서 나온 계책이었음을 알 수 있다.
1908년(융희 2) 8월 13일 어원사무국 관제가 공표되고 동물 전문가 시모고리야마 세이이치[下郡山誠一]와 오카다 노부토시[岡田信利], 식물 전문가 후쿠바 온조[福羽恩藏] 등을 초빙하여 동물원과 식물원 조성의 실무 기술자로 임명하였다. 1910년(융희 4) 일본이 대한제국을 강제로 병탄한 이후에 창경원은 이왕직(李王職)에서 직접 관리하던 이왕가 소속의 공원이었다. 이왕직은 일본 황실의 하부로 재편입된 대한제국 황실 가족을 관리하던 부서이다. 창경원은 박물관, 식물원, 동물원의 3개 부서로 구성되었다.
1909년 11월 1일 창경원 개원 시 완공된 식물원은 동양 최대 규모의 대온실이었다. 식물원은 총 178평의 목조 유리건물로 이른바 수정궁(水晶宮)이라고도 불렸다. 온실 수정궁은 일본 황실의 온실 건축가인 후쿠바 하야토[福羽逸人]가 설계하였다. 식물원에 식재된 식물은 열대와 아열대종이 다수였다. 1940년에는 총 400여 종 1,775주의 식물이 심겨져 있었다. 식물원의 중앙에는 바나나, 고무나무, 야자, 파파야 등의 열대식물이 자리하였고 식물의 종류별에 따라 구획을 나누어 선인장, 난초, 관엽 식물 등으로 배치하였다.
식물원 주변인 후원으로 이어지는 곳은 울창한 수목이 있어서 창경원 식물원의 제1 경관지였다. 그중 춘당지에는 각종 오락기구와 운동시설을 갖추어 관광 및 여가를 보내는 이들의 인기 명소였다.
변천
창경원 식물원은 창경원 내에서 동쪽에 위치하였다. 관람객은 대개 입구에서 좌측으로 돌아 동물원을 우선 구경하였다. 이어서 박물관과 식물원, 춘당지에 이르는 관람 동선을 이어갔다. 특히 인파가 몰리던 휴식공간에는 벚꽃나무를 배열하거나 터널 형태로 배식하여 봄철에는 관광객이 성황을 이루었다. 그런데 창경원에 식목된 나무 중에 벚꽃, 즉 사쿠라[櫻]가 제일 많았던 것도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조선을 왜색화시키려는 노골적인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창경원의 벚꽃 구경은 해방을 이어 현대까지 지속되다가 창경원이 다시 창경궁으로 복원되면서 사라졌다. 순종이 서거하던 시기인 1926년 4월 24일에도 벚꽃 놀이가 개최되었으나 25일에 순종이 서거하자 폐원되었다. 그러나 2개월 이후인 6월 25일에 재차 개원하였다.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에는 야간 벚꽃놀이가 중지되었다가 1958년 4월부터 재개되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동아일보(東亞日報)』
- 『매일신보(每日新報)』
- 곤도 시로스케 지음·이언숙 옮김, 『대한제국 황실비사』, 이마고, 2007.
- 이왕직, 『창경원 안내』, 1934.
- 김현숙, 「창경원 밤 벚꽃놀이와 야앵(夜櫻)」, 『한국근현대미술사학』제19집,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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