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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29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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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산 |
한글표제 | 산 |
한자표제 | 傘 |
상위어 | 노부(鹵簿), 의장(儀仗) |
동의어 | 산(繖) |
관련어 | 개(盖), 거개(車盖), 곡개(曲盖), 곡개(曲蓋), 대산(大繖), 반차(班次), 산개(傘蓋), 산선(傘扇), 산선(繖扇), 시위(侍衛), 양산(凉傘), 양산(陽傘), 우산(雨傘), 일산(日傘), 전좌(殿座), 청양산(淸陽繖), 행행(行幸), 홍산(紅傘), 홍양산(紅陽繖), 화개(華蓋), 화산(華傘), 황산(黃傘), 황양산(黃陽傘), 황일산(黃日傘) |
분야 | 왕실/왕실의례/예기 |
유형 | 개념용어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대한제국기 |
집필자 | 이왕무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산(傘)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중종실록』 22년 5월 26일, 『중종실록』 22년 5월 26일, 『정조실록』 6년 5월 22일 |
왕과 왕비 등의 왕족이 행차하거나 의례 공간에 위치할 때 주변에서 시위 혹은 배치하였던 비를 막고 해를 가리던 유형의 의장물.
개설
산은 춘추시대에 각국의 제왕들이 행차 시 의장으로 사용할 만큼 그 기원이 오래되었다. 이후 산은 산(繖)과 동일하게 취급되면서 삼국시대,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에도 왕과 왕족의 행차 시에 동원되던 의장이었다. 조선시대 왕의 행차 시에 산선(繖扇)과 시위(侍衛)는 평상시와 같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늘 사용되는 중요한 의장이었다.
내용 및 특징
산은 오늘날 이용되는 우산과 양산과는 다른 의장용 기구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19세기에 이르러서야 일반인들이 우산과 양산을 이용하였듯이 왕의 산은 의장용으로만 사용되었다. 산은 고대 동북아시아 제왕들의 권위를 나타내는 도구로 사용하던 것에서 유래한다. 당시에 산은 개(盖)의 하나로 언급되었다. 개는 중국 고대 한나라시대에 수레에 둑기[纛旗]와 같이 설치하던 것에서 시작하였다. 당나라 때에는 산(繖)을 대개(大盖)라고도 하였다. 그런데 당나라 무제(武帝) 때에 감천궁(甘泉宮)에 행행하다가 수레에서 큰 바람을 맞게 되어 앞으로 나가기 힘들게 되자 대개를 수레에서 해체하여 내리게 되었다. 이후 대개는 수레 위가 아닌 지상에서 이동하는 의장이 되었다. 진(晉)나라에서는 개의 한 종류인 화개(華盖)를 하늘의 별자리인 구성(九星)의 아래에 위치하는 것이라고 해석하면서 황제로 상징하였다. 이런 상징적 의미 외에 기능적인 부분도 있었다. 『대명집례(大明集禮)』에서 산(繖)은 비를 피하는 용도로 설명하였다.
그런데 조선에서는 산(傘)과 산(繖)이 동일하게 취급되거나 개와 섞여 쓰인 중국과 달리 2가지의 산이 구별되어 사용되기도 하였다. 조선전기에는 그 구별이 드러나지 않았다(『중종실록』 22년 5월 26일). 그러나 조선후기에 기록된 각종 왕 관련 의궤와 등록의 반차도에서 왕은 황일산(黃日傘)과 황양산(黃陽繖), 왕세자는 청일산(淸日傘)과 청양산(靑陽傘)을 사용하였다. 반면 왕비의 행차에서는 산(傘)이 의장 반차에 없으며 산(繖) 종류만 나타난다.
그밖에 산은 황산(黃傘), 양산(陽傘), 황양산(黃陽傘), 우산(雨傘), 양산(凉傘) 등 다양하게 구분되었다. 산의 용도가 의장용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하며, 그 형태가 상이한 것은 그 기원과 기능이 다르기 때문이다. 예컨대 산과 같은 유래를 가진 개의 경우에서 곡개(曲盖)는 중국 주나라의 태공(太公)이 만들었다고 한다. 태공이 은나라를 정벌하던 와중에 큰 바람으로 인해 개가 꺾어져 곡개로 만들었는데, 이것을 한나라와 송나라, 고려가 이어서 사용하였다. 『고려도경(高麗圖經)』에서는 개(盖)를 개(蓋)로 표시하였다. 기능 면에서는 햇빛이나 비, 눈 등을 차단하려는 것에서 원형, 장형, 방형 및 크기에 차이가 생겼다. 양산(凉傘)은 햇빛의 강약과 관계없이 날씨가 무더울 때 사용하던 것이다.
반면 왕의 의장용 상징물인 산이 반차에서 제외되거나 사용하지 않는 경우가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기우제이다. 1527년(중종 22) 5월에 중종은 고려시대부터 한재(旱災)가 너무 심할 경우엔 산선(傘扇)을 금하기도 하고 산선(繖扇)을 없애기도 했다면서 더위를 피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 가뭄을 극복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중종실록』 22년 5월 26일). 이런 양상은 조선후기 정조대에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1782년(정조 6) 정조는 창경궁에서 산선(傘扇)과 시위는 물론 산개(傘盖)를 모두 물리친 뒤 기우제 단소(壇所)에 행행하였다(『정조실록』 6년 5월 22일).
변천
왕실의 상장례에서는 흑색의 산이 이용되었고, 사신을 영접할 때는 청색을 사용했다. 흑색은 상장례임을 의미했으며, 청색은 제후국의 지휘임을 드러낸 것이다. 그밖에 정치적 혹은 군사력의 중심이 되는 인물 주변이나 배하에 있는 것을 산하(傘下)에 있다는 말로 사용하였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속오례의(續五禮儀)』
- 『춘관통고(春官通考)』
- 『각전궁동가의절(各殿宮動駕儀節)』
- 『고려도경(高麗圖經)』
- 『대명집례(大明集禮)』
- 백영자, 『조선시대의 어가행렬』, 한국방송통신대학교, 1994.
- 이왕무, 「조선후기 국왕의 陵幸 연구」,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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