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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29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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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성주사 |
한글표제 | 성주사 |
한자표제 | 聖住寺 |
상위어 | 자복사(資福寺) |
동의어 | 오합사(烏合寺) |
관련어 | 법왕(法王), 무왕(武王), 무염(無染), 성주산문(聖住山門), 자은종(慈恩宗), 자복사찰(資福寺刹), 성주사지(聖住寺址), 낭혜화상탑비(郎慧和尙塔碑) |
분야 | 문화/종교/불교 |
유형 | 개념용어 |
지역 | 충청남도 보령시 미산면 |
시대 | 백제~조선 |
집필자 | 윤기엽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성주사(聖住寺)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태종실록』 7년 12월 2일 |
태종대 88개 자복사 가운데 하나로, 충청남도 보령시 미산면성주산에 있었던 절.
개설
7세기 때 백제 법왕(法王)이 창건하여 오합사(烏合寺)라고 하였다. 845년(신라 문성왕 8) 무염(無染)이 절을 크게 중창하자 문성왕이 성주사(聖住寺)라는 절 이름을 내렸고, 이후 성주산문(聖住山門)의 중심 사찰로 발전했다. 고려시대의 연혁은 전하지 않고, 조선 태종 때 자은종의 자복사찰(資福寺刹)로 지정되는 지방 명찰(名刹)이었지만 임진왜란 때 폐사되었다. 현재 성주사지(聖住寺址)는 충청남도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에 있고, 1984년 8월 사적 제307호로 지정되었다.
내용 및 변천
(1) 창건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백제 법왕(法王)이 창건한 절로 처음에는 오합사(烏合寺)라고 불렀다. 845년(신라 문성왕 7) 당(唐)에서 돌아온 낭혜 화상무염(無染)이 주지로 있으면서 절을 크게 중창하자 이에 문성왕이 성주사(聖住寺)라는 절 이름을 내렸다. 일설에는 616년(백제 무왕 11) 무왕(武王)이 신라와의 전쟁에서 이긴 것을 기념하고 전몰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창건했다고도 한다. 846년(신라 문성왕 8)에 무염이 개산한 성주산문의 중심 사찰로 발전한 성주사는 전체 1,000여 칸의 규모에 2,500여 명의 승려들이 머물며 수행했다고 전한다. 절이 한창 번성하였을 때는 쌀 씻은 물이 성주천을 따라 10리나 흘렀다고 한다.
(2) 조선시대
1407년(태종 7) 12월, 남포(藍浦: 현 충청남도 보령시) 성주사가 자은종의 자복사찰로 지정되었다(『태종실록』 7년 12월 2일). 당시 조선시대의 불교 종파는 이전 11개(혹은 12개) 종파에서 조계종(曹溪宗), 천태종(天台宗), 화엄종(華嚴宗), 자은종(慈恩宗), 중신종(中神宗), 총남종(摠南宗), 시흥종(始興宗) 등 7개 종파로 정리되었는데, 남포 성주사는 자은종에 소속된 자복사찰이었다. 자복사찰은 나라의 안녕과 고을의 복을 빌기 위해 지정한 사찰로, 당시 성주사가 남포 지역을 대표하는 명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성주사의 소속이 본래 선종에서 자은종으로 바뀐 점도 주목할 만하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폐사된 것으로 보고 있다.
(3) 현대
현재는 절터만 남아 있다. 여기에는 남에서부터 차례로 중문, 석등, 5층석탑(보물 제19호), 금당건물과 그 뒤에 동서로 나란히 서 있는 동3층석탑, 중앙3층석탑(보물 제20호), 서3층석탑(보물 제47호)이 있고 그 뒤에 강당이 자리하고 있다. 1968년, 1974년의 발굴 조사 결과 건물의 초석, 통일신라시대 불상의 머리, 백제·통일신라·고려시대의 기와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후 2009년 제7차, 2010년 제8차 발굴 조사를 통해 자기류, 명문기와 등 수백점의 유물이 출토되었고 건물지, 석조시설, 담장열 등이 확인되었다. 1984년 8월 성주사지가 사적 제307호로 지정되었다.
문화재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保寧 聖住寺址 朗慧和尙塔碑, 국보 제8호)는 성주산문을 일으킨 낭혜 화상무염을 위해 890년에 세워진 탑비로 높이는 4.55m이다. 비문은 최치원이 지었고 글씨는 최인연이 쓴 것으로 사산비명(四山碑銘) 중 하나이다. 낭혜 화상의 행적이 총 5,000여 자에 달하는 장문으로 적혀 있다.
보령 성주사지 5층석탑(保寧 聖住寺址 五層石塔, 보물 제19호)은 성주사지의 동서로 건립된 3기의 석탑과 조금 떨어진 남쪽에 따로 건립된 신라말의 5층석탑이다. 이 석탑은 높이 6.6m로 2층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으로 각부의 세부 표현이나 양식 등은 3기의 3층석탑과 거의 유사하다. 1971년 해체 수리 공사 때 1층 탑신 윗면에서 사리공(舍利孔)이 발견되었으나 유물은 없었다.
보령 성주사지 중앙3층석탑(保寧 聖住寺址 中央三層石塔, 보물 제20호)은 성주사지에서 금당터로 추측되는 건물터 뒤편에 나란히 서 있는 3기의 석탑 중에서 가운데에 있는 탑이다. 함께 나란히 서있는 탑들과 마찬가지로 상·하 2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리고 있고, 신라말의 석탑으로 추정하고 있다. 보령 성주사지 서3층석탑(保寧 聖住寺址 西三層石塔, 보물 제47호)은 석탑 3기 중 서쪽에 위치한 3층석탑으로, 높이는 4m이다. 1971년 탑을 해체·수리했을 때 1층 탑신 윗면에 있었던 사리장치는 이미 도굴당한 상태였다. 성주사지 동3층석탑(聖住寺址 東三層石塔,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26호)은 석탑 3기 중 동쪽에 위치한 3층석탑으로, 높이는 4.6m이다. 석탑 3기 중 키가 가장 큰 편이다. 김립지(金立之)가 쓴 『성주사사적기(聖住寺寺蹟記)』에 의하면 3기의 3층석탑은 3세불(三世佛)인 정광불(定光佛)·약사불·가섭불의 사리탑이라고 한다.
성주사지 석등(聖住寺址 石燈,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33호)은 높이 2.2m의 신라 양식의 석등으로 1971년 5층탑 해체 수리 때 주변에서 수습 복원하였다.
참고문헌
- 『삼국사기(三國史記)』
- 『삼국유사(三國遺事)』
- 『성주사사적기(聖住寺寺蹟記)』
- 권상로, 『한국사찰전서』, 동국대학교출판부, 1979.
- 문화재연구소 편, 『문화유적총람』,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1977.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