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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28 판



태종대 88개 자복사 가운데 하나로, 울산광역시 울주군 상북면가지산에 있는 절.

개설

석남사(石南寺)는 824년(신라 헌덕왕 16) 신라에 최초로 선법(禪法)을 전한 도의(道義) 국사(國師)가 9세기 초에 창건하였다. 고려시대에 절의 연혁은 전하지 않는다. 조선 태종 때 조계종의 자복사찰(資福寺刹)로 지정된 지방 명찰이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현종 때 언양현감의 시주로 중창하였고, 순조 때 중수하였다. 6·25전쟁으로 절이 거의 폐허화되어 고찰의 모습은 사라졌다. 1957년 비구니 인홍이 주지로 부임하여 크게 중창하고 이후 비구니 수행도량이 되었다. 비구니 종립특별선원(宗立特別禪院)이 있는 절로 유명하다.

내용 및 변천

(1) 창건

헌덕왕 때 당(唐)에 건너가 서당지장(西堂智藏)으로부터 인가(印可)를 받은 도의 국사가 821년(신라 헌덕왕 13) 귀국하여 진전사(陳田寺)에서 수행하던 중 석남사를 창건했다고 한다. 가지산(迦智山)을 석안산(石眼山)이라고도 하는데, 절이 석안산의 남쪽에 있다고 하여 석남사(石南寺)로 하였다고 한다. 창건된 이후 고려시대까지 절에 대한 연혁은 전하지 않는다.

(2) 조선전기

1407년(태종 7) 언양(彦陽: 현 울주) 석남사가 조계종의 자복사찰로 지정되었다(『태종실록』 7년 12월 2일). 당시 조선시대의 불교 종파는 이전 11개(혹은 12개)에서 조계종(曹溪宗), 천태종(天台宗), 화엄종(華嚴宗), 자은종(慈恩宗), 중신종(中神宗), 총남종(摠南宗), 시흥종(始興宗) 등 7개 종파로 정리되었는데, 언양 석남사는 조계종에 소속된 자복사찰이었다. 자복사찰은 나라의 안녕과 고을의 복을 빌기 위해 지정한 사찰이었으므로, 조선전기에 석남사가 언양을 대표하는 명찰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한동안 폐사되었다.

(3) 조선후기

1674년(현종 15) 언양현감(彦陽縣監)강옹(姜甕)의 시주로 탁령(卓靈), 자운(慈雲), 의철(義哲), 태주(泰珠) 등이 중창하였다. 이어 정우(淨佑), 각일(覺日), 석맹(碩孟) 등이 극락전, 청풍당, 청운당, 청화당, 향각 등을 증축하였고, 희철(熙哲)이 명부전을 세웠다. 1803년(순조 3) 침허(枕虛), 수일(守一) 등이 중수하였다.

(4) 근현대

일제강점기인 1912년에 우운(友雲)이 중수하였다. 1950년 6·25전쟁으로 절은 폐허화되고 남아 있던 신라 고찰의 모습은 모두 파괴되었다. 1957년 비구니 인홍(仁弘)이 주지로 부임하여 대웅전, 극락전, 그 밖의 부속 시설을 중창하고 종각, 침계루, 심검당 등을 신축하여 사찰의 면모를 일신하였다. 이때부터 비구니의 수행 도량이 되었다. 현재 건물의 동수는 총 30여 동이며, 가장 큰 규모의 비구니 종립특별선원(宗立特別禪院)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문화재

울주 석남사 승탑(蔚州 石南寺 僧塔, 보물 제369호)는 도의 국사의 사리탑으로 높이 3.53m의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으로 되어 있다. 1962년 5월에 해체 보수되었다.

석남사 3층석탑(石南寺 三層石塔, 울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2호)은 도의 국사가 나라를 외적으로부터 지키려는 간절한 마음에서 824년(신라 헌덕왕 16)에 15층의 대탑으로 세웠으나 임진왜란 때 손실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1973년에 개축되었고 2층으로 된 기단 위에 세운 3층석탑으로, 높이는 2.5m이다. 신라말의 일반적인 3층석탑 형식을 취하고 있다.

석남사 수조(石南寺 水槽, 울산광역시 문화재자료 제4호)는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물통으로 크기는 높이 91㎝, 길이 270㎝이다. 조성 연대는 고려말에서 조선초로 알려져 있다.

참고문헌

  • 권상로, 『한국사찰전서』, 동국대학교출판부, 1979.
  • 문화재연구소 편, 『문화유적총람』,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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