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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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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별번 |
한글표제 | 별번 |
한자표제 | 別燔 |
관련어 | 번조(燔造), 진상자기(進上磁器) |
분야 | 문화/예술/미술 |
유형 | 개념용어 |
시대 | 조선 |
왕대 | 조선 |
집필자 | 박경자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별번(別燔)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인조실록』 23년 5월 28일 |
관요에서 상례(常例)로 봄과 가을에 진상 자기를 제작하는 것 외에 특별한 용도가 생겼을 때 별도로 자기를 번조하는 것.
개설
별번(別燔)은 상례로 진상하는 것 외에 별도의 용도가 발생하여 특별히 자기를 번조하는 것이다. 사옹원 사기소인 관요에서는 일 년에 두 차례 봄과 가을에 진상용(進上用)의 자기를 번조하였다. 별번 자기는 왕실의 연회, 가례, 의례, 조공(朝貢) 등 그 용도가 특별하게 정해졌기 때문에 품질이 좋았으며 제작하는 양은 정해져 있지 않았다. 별번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은 『조선왕조실록』에서 확인할 수 없으나 조선후기의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와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에 인조에서 영조 연간에 걸쳐 여러 건이 기록되었다.
내용 및 특징
1694년(숙종 20)에 당시 정례적인 진상 자기의 공식적인 양은 연간 1,300여 죽(竹)인 13,000여 개에 달했으며 같은 해 별번사기(別燔沙器) 즉 별번한 백자의 양은 572죽에 달해 과도한 별번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전에도 사옹원 제조(提調)들이 나누어 가질 그릇을 공용의 그릇과 대등하게 만드느라 지나치게 많은 양의 자기를 번조한 것에 대해 이조(吏曹)의 관리가 문제를 제기하고 규정대로 바로잡을 것을 건의하였다(『인조실록』 23년 5월 28일). 이는 조선후기에 분원의 도제조(都提調)와 제조를 주로 종친이 맡은 데서 비롯되었다. 별번 자기의 진상 과정에서 이들이 사사로이 취한 자기의 양은 막대해서 분원 경영의 위기를 초래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 제작된 관요산(官窯産) 백자 중 굽 안쪽에 ‘別’ 자를 유약 위에 음각하거나 산화코발트인 청화 안료로 쓴 예가 별번 자기에 해당한다. 별번은 자기 외에 기와의 제작에 관한 기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방병선, 『조선후기 백자 연구』, 일지사, 2000.
- 박정민, 「조선 전기 명문백자 연구」, 명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4.
- 박형순, 「조선시대 관요 백자 명문의 성격」, 2013.
- 전승창, 「京畿道 廣州 官窯의 設置時期와 燔造官」, 『미술사연구』 22,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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