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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27 기준 최신판



고려·조선시대에 본처가 아닌 첩에게서 태어난 자식 및 자손.

개설

서얼(庶孽)은 통상 첩(妾)이 낳은 자식과 그 자손을 이르는 말로, 양인 신분인 첩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을 서자(庶子), 노비 신분인 첩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을 얼자(孽子)로 구별하여 불렀다. 서얼은 부친은 양반 사족의 혈통이나 모친이 양인 및 노비 신분의 첩이었기에 부친과 달리 양반 사족으로서의 지위를 누리지 못하는 특수 신분층이었다.

고려시대에는 처나 첩을 여러 명 두는 경우가 많았기에 적서(嫡庶) 간의 차별이 두드러지지 않았다. 그런데 조선시대는 주자성리학(朱子性理學)이 국가 및 사회의 통치 운영 이념으로 자리 잡게 됨에 따라 조선 왕조의 지배 계급인 양반 사족은 자신들과 혈통상 귀천의 차이가 있는 서얼의 관직 등용에 제한을 두기 시작하였다.

서얼은 첩의 소생이라는 이유로 국가로부터 여러 제약을 받았는데, 그 대표적인 제약이 서얼금고법(庶孼禁錮法)이라 하여 관직에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또한 재산 상속에 있어서도 서얼은 본처의 소생인 적손(嫡孫)보다 적게 물려받는 차별 대우를 받았다.

그렇지만 조선중기 이후 서얼에 대한 제약이 완화되어 과거 응시를 허용하게 되었고, 이후에도 여러 차례 차별 완화 조치가 시행되었다. 결국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때 적서에 대한 구분·차별이 법제상 완전히 폐지되었다.

내용 및 특징

서얼은 부계로는 양반 사족의 혈통을 받았으나 모계가 본부인이 아닌 첩이었기 때문에 사족으로서의 지위를 누리지 못하였다. 서얼은 첩실 자손 모두를 통칭하는 용어이나 서(庶)는 양인 신분인 첩의 자손을, 얼(孽)은 노비 신분인 첩의 자손을 뜻하는 것으로 구분하여 사용되었다(『명종실록』 8년 10월 15일).

조선시대 신분 질서 상 서손(庶孫)은 양인 이상의 신분을 얻게 된 반면, 얼손(孽孫)은 양인 이하의 신분을 얻게 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러한 신분 귀속(歸屬)에 따라 서얼은 국가 및 사회로부터 여러 제약을 받았다. 그 대표적인 제약이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게 하고, 또 관직에 나아간 경우 승품(陞品)에 제한을 두거나 청요직(淸要職)에 부임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또한 재산 상속에 있어서도 적손(嫡孫)에 비해 서손의 경우 1/7, 얼손의 경우에는 1/10만 지급받도록 규정하였다.

서얼이 관직에 나아가지 못하도록 한 것은 1415년(태종 15) ‘서얼금고법’이 제정된 이후였다(『태종실록』 15년 6월 25일). 이러한 서얼 차별은 이후 『경국대전』에 서얼을 문과 시험은 물론 생원·진사시에도 응시하지 못하는 것으로 확대 규정하면서 서얼의 과거 응시 자격까지 박탈하게 되었다. 즉, 원칙 상 양반 사족의 자손이라도 첩의 소생은 관직에 나아갈 수 없게 된 것이다.

물론 서얼의 관직 진출이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었다. 간혹 기술직(技術職)과 같이 제한된 범위 내에서 관직에 등용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관직에 등용되었더라도 ‘한품서용법(限品敍用法)’이 적용되어 ① 문무 2품 이상 관리의 양인 첩 자손은 정3품, 천인 첩 자손은 정5품까지, ② 문무 6품 이상 관리의 양인 첩 자손은 정4품, 천인 첩 자손은 정6품까지, ③ 문무 7품 이하나 관직이 없는 사람의 양인 첩 자손은 정5품, 천인 첩 자손은 정7품까지만 관직에 오를 수 있었다. 즉, 모친의 신분에 따라 승품(陞品)에 제한을 받았던 것이다.

이처럼 과거에 응시할 수는 없었지만 제한된 범위 내에서나마 관직에 서용될 수 있었던 주된 사정은 서얼이 대체로 기술관직에 진출하였던 데에 있었다. 2품 이상 관리의 첩 자손의 경우 각각의 재능에 따라 사역원(司譯院)·관상감(觀象監)·전의감(典醫監)·혜민서(惠民署)·도화서(圖畵署) 등 관서의 기술관직에 임용되는 것이 허용되었다. 이러한 연유로 조선후기에 들어오면 중인(中人)으로 불린 기술관과 서얼을 함께 불러 ‘중서(中庶)’ 신분이라 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서얼에 대한 차별이 심했던 까닭은 조선시대의 지배 계급인 양반 사족이 신분제 사회를 철저하게 유지·강화시켜 자신들의 기득권과 특권을 잃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었다. 조선시대 사회를 구성한 여러 신분층 중에서 서얼, 특히 양반 사족의 양첩 자손은 자신들이 지닌 권한에 도전할 수 있는 경계인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변천

서얼에 대한 차별 폐지 및 서얼의 신분 상승을 위한 운동이 끊임없이 전개되면서 서얼의 과거 응시 및 관직 진출이 점차 허용되기에 이른다. 명종대인 1550년대에 들어와서는 양인 첩의 경우에 한하여 손자 대부터 과거에 응시할 수 있게 하되 합격 문서에 서얼 출신임을 밝히도록 하였으며, 1779년(정조 3)에는 규장각(奎章閣)에 검서관(檢書官) 제도를 두어 학문이 뛰어난 서얼 출신들을 임명하기도 하였다(『정조실록』 3년 3월 27일). 그 뒤에도 여러 차례 차별 완화 조치가 시행되었으나 오래된 폐습을 없애지 못하다가 1894년 갑오개혁 때 법제상으로 신분에 따른 차별이 완전히 폐지되기에 이르렀다.

참고문헌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김경숙, 『조선 후기 서얼 문학 연구』, 소명출판, 2005.
  • 김필동, 『차별과 연대: 조선 사회의 신분과 조직』, 문학과지성사, 1999.
  • 이상백, 『한국 문화사 연구 논고』, 을유문화사, 1947.
  • 조우영, 『경국대전의 신분 제도』, 한국학술정보, 2008.
  • 박천규, 「조선 전기 서얼의 사회적 지위」, 『사학연구』30, 1980.
  • 배재홍, 「조선 전기 처첩 분간과 서얼」, 『대구사학』41, 1991.
  • 배재홍, 「조선 후기의 서얼 허통」, 『경북사학』10, 1987.
  • 이태진, 「서얼 차대고(差待考): 선초 첩자 「한품서용」제의 성립 과정을 중심으로」, 『역사학보』27, 1965.
  • 최이돈, 「조선 초기 서얼의 차대와 신분」, 『역사학보』204,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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