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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26 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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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비보사찰 |
한글표제 | 비보사찰 |
한자표제 | 裨補寺刹 |
관련어 | 도선(道詵), 도선밀기(道詵密記), 훈요십조(訓要十條), 산천비보도감(山川裨補都監), 비보소(裨補所), 무학대사(無學大師), 비보사탑설(裨補寺塔說), 자복사(資福寺),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 |
분야 | 문화/종교/불교 |
유형 | 개념용어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고려, 조선 |
집필자 | 윤기엽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비보사찰(裨補寺刹)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태조실록』 7년 윤5월 11일, 『태종실록』 7년 12월 2일 |
신라말 고려초의 승려 도선의 비보사탑설에 근거해 건립된 사찰.
개설
승려 도선(道詵)은 중국에서 체계화된 풍수 사상을 배워 그것을 신라에 전하고 풍수에 관련된 많은 저술을 남겼을 뿐 아니라 풍수적 관념에 기반을 독창적인 비보사탑설(裨補寺塔說)을 주장했다. 비보사탑설은 태조왕건에 의해 수용되면서 고려 전 시기에 걸쳐 크게 유행하였고, 조선초에도 비보사찰(裨補寺刹)이 세워질 정도였다. 그러나 태종대 억불 정책의 시행 과정에서 비보사찰은 완전히 부정되었다.
연원 및 특징
비보(裨補)란 부족한 부분을 채운다는 의미로, 풍수(風水)에서 지기(地氣)가 부족한 부분에 여러 조치를 취하여 취약한 부분을 없애거나 명당으로 만드는 일련의 방법을 말한다. 한국사에서 비보적인 풍수 관념의 시작은 신라말의 선승(禪僧) 도선(道詵)에게서 찾을 수 있다. 풍수지리설의 대가였던 도선은 국토에 대한 각종 비기(秘記)와 답산가(踏山歌)를 남기며 산천의 형세를 유기적으로 파악하여, 땅에 순역(順逆)이 있고 강약이 있다고 보았다. 사람에게 병이 들면 그 혈맥(血脈)을 찾아 침을 놓고 뜸을 떠서 병을 고치는 것처럼, 산천에도 병이 들면 지정한 곳에 사원(寺院)을 짓거나 불상, 탑, 부도 등을 세우면 병을 고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도선이 행한 풍수적 조치가 대개 불교적 양식인 절이나 탑, 부도 등을 통해 이루어진 까닭에 이것을 비보사탑설이라고 한다. 산천의 기운이 조화롭지 못해 병이 생기면 인간 세상에 혼란을 가져오므로 그 병을 치료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풍수적인 조처를 행함으로써 이를 극복하거나 조화를 추구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러한 비보적 관념은 주어진 지세(地勢)에 의지하기보다는 현재의 삶터를 보다 좋은 땅으로 만들고자 하는 것으로 땅에 대한 매우 적극적인 풍수 관념이라고 할 수 있다. 비보설이 중심이 된 도선의 풍수 사상은 한국 풍수 사상의 고유한 특징이 되었다.
변천
(1) 고려의 비보사찰
비보사탑설은 고려의 태조왕건(王建)에게 수용되어 개국의 사상적 배경이 되었을 뿐 아니라 국가 운영의 원리로 실천하였다. 태조는 훈요십조(訓要十條)에서 "여러 사원은 모두 도선이 산수(山水)의 순역을 추점(推占)해서 창건한 것이다. 도선이 이르기를 ‘점쳐서 정한 것 이외에 마구 새로 지으면 지덕(地德)을 훼손하여 국조(國祚)가 영속하지 않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행여 후세의 국왕이나 왕비, 신하 들이 원당 등이라 일컬으면서 더 창건할까 크게 근심스럽다."고 할 정도였다. 1197년(고려 신종 1)에는 산천비보도감(山川裨補都監)이라는 기관을 설치하여 사찰 건립이나 조산(助山) 등을 수행하도록 했다.
『도선밀기』에서 지정한 비보소(裨補所)는 3,800개소에 달하고, 고려초에 개경을 중심으로 하여 전국에 비보사찰로 지정된 절은 대략 3,000여 개에 이르렀다. 전국에 걸쳐 있던 비보사찰로는 태조대에 창건된 10대 사찰(법왕사, 왕륜사, 자운사, 내제석원, 사나사, 천선원, 신흥사, 지장사, 문수사, 원통사)을 비롯해 왕실의 진전사원(眞殿寺院), 역대의 국왕이 추인 또는 창건한 사찰이 포함되었다. 비보사찰로 지정된 절은 국가로부터 전(田)과 민(民)을 분급 받아 사원에 소속된 특수 촌락인 촌장(村莊) 혹은 사장(寺莊)을 지배, 운영하였다. 그 촌락의 운영은 비보사찰의 주지가 담당하였고, 이곳에는 재가화상(在家和尙)이나 수원승도(隨院僧徒)가 거주했다. 일반적인 승려와 달리 가정을 일구고 토지 등의 항산을 소유하고 있던 재가화상과 수원승도는 사찰의 토지를 경작하고 불사(佛事)나 마을의 일에 동원되었으며, 전시에는 의승군(義僧軍)에 편성되어 활동했다. 그러나 비보사찰에 대한 국가의 지나친 혜택과 보호는 많은 사회적 폐단을 불러와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2) 조선초의 비보사찰
고려 왕조 500년을 내려온 비보사찰은 조선 왕조 개국 초까지 그대로 유지되었다. 태조이성계는 무학(無學) 대사(大師)와 함께 한양의 지덕을 비보하기 위해 4대 비보사찰인 동쪽의 청련사, 서쪽의 백련사, 남쪽의 삼막사, 북쪽의 승가사를 창건하였고, 태종 초 『밀기(密記)』에 기록된 비보사찰은 각 고을의 『답산기(踏山記)』에 실린 사찰과 함께 국가로부터 보호를 받는 위치에 있었다. 하지만 조선초의 유학자 관료들은 비보사찰을 일컬어 백성들의 눈과 귀를 속이는 허무괴탄한 설(說)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태조실록』 7년 윤5월 11일). 조선초 비보사찰은 1406~1407년(태종 6~7)에 걸쳐 시행된 사사혁거(寺社革袪)와 자복사(資福寺) 88사의 지정으로 사실상 부정되었고, 더 이상 국가로부터 보호받지 못하게 되었다(『태종실록』 7년 12월 2일).
참고문헌
- 서윤길, 「도선과 그의 비보사상」,『한국불교학』1, 한국불교학회, 1975.
- 이진삼, 「도선의 비보사상 연구 –풍수, 도참, 음양, 오행, 밀교 사상 비교를 중심으로-」, 『한국사상과 문화』55, 한국사상문화학회, 2010.
- 황인규, 「고려시대 사찰과 불교문화 –비보사사와 그 문화를 중심으로-」, 『역사와 교육』12, 역사와 교육학회,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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