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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24 기준 최신판



조선 후기에 유행한 풍조로, 중국의 문물을 수입하고 배우려는 경향.

개설

당학(唐學)은 ‘당(唐)을 배운다’는 뜻으로, 중국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입하여 배우려는 경향을 가리킨다. 여기서 당은 중국 또는 청나라를 의미한다. 당학이 사회 문제로 떠오른 정조 연간에는 여진족이 지배하는 청나라를 배격하여, 청의 문물을 수입하고 배우는 일체의 경향에 부정적이었다. 비하의 감정으로 보았던 청나라의 문화에 조선 사회가 물들어 가는 것을 일종의 문화적 오염으로 보고 거부하려는 태도가 강했던 것이다.

한편 당학은 북학(北學) 또는 중원학(中原學)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북학파(北學派) 학자들은 북학을 사회 개혁책으로 추진하여, 실제로는 중국의 발달한 물질문화와 서적을 수입하면서도 겉으로는 부정적인 태도를 취한 지식인들과 달랐다. 이들은 학문적으로 체계화하면서 청으로부터 문화를 수입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하였다.

내용 및 특징

1. 당학의 의미와 성격

당학은 중국의 문물을 수입하고 문화를 배우려는 태도를 뜻한다. 당(唐)은 일반적으로는 중국을 가리키지만, 구체적으로는 청나라를 지칭한다. 당학이 하나의 용어로 크게 부각된 시기는 정조 연간이다. 경화세족(京華世族)을 비롯한 일부 관료와 학자들은 청나라의 발달한 문물을 수입하고 그들의 학문을 수용하는 데 적극적이었다. 그 이전에는 명나라를 점령하고 조선을 공격한 여진족의 나라인 청에 대해 우호적이지 않았다. 조공을 바치며 외교 관계를 유지하여 문물의 교류가 지속되기는 했으나, 청나라의 문물을 수입하거나 배우려는 태도는 극히 미약하였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전쟁에 대한 기억이 잊히고 국제 정세가 안정되면서 18세기 이후에는 조선과 청나라의 관계가 공고해졌고, 문물의 왕래는 더 빈번해졌다. 그 결과 청나라의 발달한 문물과 새로운 학문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난 것이다. 당시에는 이러한 일련의 움직임을 당학이라는 용어로 표현했는데, 이 표현에는 부정적인 시각이 담겨 있다.

2. 당학과 북학

발달한 청나라의 문화를 인정하고 그들의 선진 문물을 배우자는 입장에서 당학은 북학 혹은 중원학과 매우 유사하다. 그러나 당학이라는 용어에는 청나라의 문화를 수용하려는 움직임을 거부하는 부정적인 시각이 담겨 있다는 점에서 북학 또는 중원학과 차이가 있다. 1792년(정조 16) 10월에 정조가 문체반정(文體反正)을 시행했을 때, 이덕무는 박제가에게 보낸 편지에서 "세상에서 당학·당벽(唐癖)·당한(唐漢)·당괴(唐魁)라는 말들이 나돌고 있는데 그 말이 모두 박제가에게 집중되었다."고 하였다. 당학과 북학이 실제로는 같은 학문적 태도를 가리키지만, 고질병이라는 뜻의 ‘벽’, 괴수라는 뜻의 ‘괴’ 등의 단어에서 볼 수 있듯이 세상에서는 당학을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남공철도 이단전(李亶佃)의 시를 평가한 「이군시서(李君詩序)」에서 중원학자(中原學者)라고 부르는 부류가 있고 그들을 배척하는 부류가 있다고 하여, 당시에 중국을 배우는 문제를 놓고 갈등이 벌어졌음을 암시했다. 중원학의 실체 역시 당학 또는 북학을 가리킨다. 한편, ‘북학’이 학문적 지향이 뚜렷한 박제가와 같은 일군의 ‘학자’를 가리키는 반면, ‘당학’은 중국의 물건을 수입하는 실질적인 ‘행위’를 폭넓게 가리키기도 한다는 점에서 더 광범위하게 사용된 개념이다.

3. 당학의 실체와 영향

당학의 구체적인 내용은 정조의 언행을 기록한 『일득록(日得錄)』에 잘 나타나 있다. 그에 따르면, 정조는 당학을 크게 세 종류로 나누어 이해했다. 즉, 명청(明淸)의 소품(小品)과 특이한 책을 많이 소장하려는 경향, 서양의 역법 및 수학을 전적으로 숭상하는 경향, 그리고 연경(燕京)에서 수입한 고가의 의류와 장식품, 그릇 등에 관심을 기울이는 경향이 있다고 이해하고, 이 세 가지가 일으키는 폐단이 실제로는 똑같다고 하였다. 서로 무관해 보이는 이 세 가지는 모두 중국에서 수입된 사조와 문물에 대한 관심과 수용이라는 측면에서는 동일하다. 새로운 사조는 기존의 조선 문화와 문학, 그리고 사유의 틀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 있고, 고가의 생활용품은 근검절약을 강조하는 조선의 풍속을 해치고 무역 역조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정조가 당학을 부정적으로 바라본 것은 통치자의 입장에서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당학의 급속한 파급으로 문화와 풍속, 종교와 과학, 경제와 사회 등 여러 측면에서 조선이 청나라의 강력한 영향력에 압도당할 수 있다고 우려한 것이다.

그에 따라 정조 연간에는 당학의 폐단을 막기 위한 각종 대책이 마련되었다. 먼저 당학의 주요 통로 역할을 한, 청나라를 오가는 외교 사절단에 대한 통제와 감시를 단행하여 고가의 사치품과 명·청의 소품 및 서양 서적의 수입을 금지하였다. 그리고 문체와 서법을 순정하게 하는 문체반정을 시행하는 한편, 사치를 배격하고 서학(西學)을 금지하는 정책으로 당학의 확산을 막고자 하였다. 1795년(정조 19)에는 교리박길원(朴吉源)이 상소를 올려, 당학의 확산을 방지하기 위한 대책을 제안하기도 하였다(『정조실록』 19년 8월 23일). 이러한 조정의 시책은 겉으로는 일정한 효과를 거둔 것으로 보이지만, 중국의 문물을 수입하고 그 문화를 배우려는 당학의 확산은 19세기에 들어와 사회의 대세로 굳어졌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 『홍재전서(弘齋全書)』
  • 『북학의(北學議)』
  • 『금릉집(金陵集)』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 안대회 엮음, 『조선후기 小品文의 실체』, 태학사, 2003.
  • 이현일, 「조선후기 고동완상(古董玩賞)의 유행과 자하시(紫霞詩)」, 『한국학논집』37,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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