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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24 기준 최신판



조선시대에 토지 1결에 대하여 매기던 세금.

내용

조선시대에 토지에 부과는 세금을 전세(田稅)라고 하였다. 원래 1결당 풍흉과 비옥도에 따라 4~20두(斗)였으나, 인조대에 풍흉에 관계없이 4두로 고정되었다. 여기에 선조대에 훈련도감이 신설되면서 삼수미(三收米) 1두 2승이 추가되었고, 광해군대에 대동법이 실시되면서 대동미 12두가 추가되었고, 영조대에 균역법이 실시되면서 결작(結作) 2두가 추가되어 결당 19두 2승이 국가에 내는 토지세였다.

그런데 국세의 하나인 군역과 환곡이 토지세로 편입되고, 여기에 인정잡비·선가·관용잡비·주인역가·진상첨가 등 각종 명목이 관속들에 의하여 부과되어 지방관청의 수입으로 들어갔다. 그리하여 결가(結價)가 후대로 갈수록 증가하여 5·60~7·80냥은 물론이고 100냥 가까이 되는 곳도 있어 농민 항쟁의 주요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용례

領議政李裕元曰 我國田稅 輕於什一 祖宗朝深仁厚澤 洽於民髓 誕啓萬億年靈長之祚 爲守牧之臣 孰敢不憧憧靡懈 敬遵遺制 而近來結價 日以增加 古之田七畓八 今則積爲五六十兩 或多至七八十兩 駸駸然莫可捄其弊源 此固無他 所謂邑區處官雜費 面捄弊等許多名色 添付於其間 使終歲耕作之民 收其所藝 盡輸於官 已極哀矜 (『고종실록』 11년 7월 30일)

참고문헌

  • 『목민심서(牧民心書)』
  • 고동환, 「19세기 부세운영의 변화와 그 성격」, 『1894년 농민전쟁연구』 1(한국역사연구회), 역사비평사, 1991.
  • 이재룡, 「朝鮮初期 田稅制度硏究」, 『韓國史學』 4, 1983.
  • 정선남, 「18·19세기 田結稅의 收取制度와 그 運營」, 『韓國史論』 22,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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