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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24 기준 최신판



정식 재산 상속 이전에 특별한 사유로 재산의 일부를 미리 증여하는 행위.

개설

별급(別給)은 조선시대 재산 상속의 한 형태로, 특별한 사유로 재산의 일부를 미리 증여하는 행위를 뜻한다. 정식 분재(分財) 이전에 행해지지만 정식 분재 시에 별급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다. 주로 등과(登科)나 관직 제수, 득남(得男) 등 축하할 일이 생겼을 때 시행한다. 별급은 재산 소유자가 국법이나 가규(家規)에 얽매이지 않고 재산 상속에 자신의 의사를 반영하는 통로로 작용한 측면이 있다.

내용 및 특징

별급이란 ‘특별히 준다’는 단어 뜻에서 보듯 특별한 사유로 재산을 주는 행위를 뜻한다. 주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이를 ‘별급’이라 하고,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별득(別得)’이라 칭한다. 정식 재산 상속과 별도로 이루어지는 별급은 주로 등과나 관직 제수, 득남 등 축하할 일이 생겼을 때 하거나, 효도에 대한 대가로 시행한다. 또는 솔양(率養)하던 정을 표현하고자 별급을 행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명확한 이유 없이 종자(宗子)나 종부(宗婦)에 대해 별급을 하기도 하고, 봉사별급(奉祀別給)이라는 명목으로 봉사조 재산을 형성·확대하고 이를 장자에게 물려주기 위한 수단으로도 이용되었다. 나아가 별급에는 혼인할 때 지급되는 신노비(新奴婢), 정식 재산 상속에서 상속분이 상대적으로 적은 첩자녀(妾子女)를 배려하기 위해 행하는 사전 증여식 재산 상속 등 다양한 형태의 상속 관행이 포함된다.

분재 문기(文記) 중 별급 문기를 분석하여 별급 사유를 파악해 보면, 가장 많이 나타나는 것은 등과나 관직 제수자에 대한 별급이다. 시기별로는 이 두 가지 사안에 대한 별급은 특히 16~17세기에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즉 자신의 능력이 재산 별득의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특히 17세기에 많이 나타나는 종자·종손에 대한 별급이다. 이는 조선전기에는 ‘봉사조 별급’의 형태로 드물게 나타나다가, 16세기 이후 가계를 계승할 만한 재목이 된다는 이유로 장자·장손에게 별급하는 사례를 말한다. 17세기에 자주 나타나는 이러한 형태의 별급은 장자·장손에 대한 우대 조처의 하나였다.

한편 효도나 시봉(侍奉)의 대가로 주는 별급은 16세기까지 많이 나타나고 17세기 이후 감소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는 조선시대의 혼인 풍속과 혼인 후 거주 지역에 대한 거주율(居住律)과 깊은 관계가 있다. 조선전기의 가족 구성은 장남이 부모와 한집에 기거하면서 부모를 봉양하는 직계 가족 형태와는 거리가 멀었다. 혼인과 동시에 처향(妻鄕)으로 이주하는 경우가 있고, 반드시 그렇지는 않더라도 형제들이 한 지역에 거주하기보다는 멀리 흩어져 있는 경우가 많았다. 분재기상에 종종 거처가 서로 멀어 한자리에 모이기가 용이하지 않은 상황이 묘사되고 있는 것이 그 예이다. 이런 거주율이라면 가까이서 부모를 돌보고, 특히 시병(侍病)에 적극적으로 노력한 자식에 대해 별급을 내리는 것은 당연한 조처로 볼 수 있다. 17세기 이후에는 장자가 부모와 함께 거주하면서 부모를 시봉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었으므로, 이러한 별급이 장자와 장자부(長子婦)에게 집중되었던 것이다.

별급 사유 중에는 특별한 이유 없이 ‘정을 표하기 위해서’라든지, 이에 준하는 표현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이는 등과나 득남과 같이 명확한 별급 사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재산 소유자의 자유로운 의사에 따라 실제 별급이 이루어진 경우를 가리킨다. 이 밖에도 개인적인 사유로 별급이 많이 이루어지고 있어, 재산 소유자의 의사가 상당 부분 별급에 반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별급은 재산 소유자와 수취자의 관계 역시 매우 다양하다. 일반적인 재산 상속이 부모로부터 자식, 조부모로부터 손자녀 등 직계로 행해지는 것과 대조적이다. 별급은 부모로부터 자식, 조부모로부터 손자녀, 처부모로부터 사위, 시부모로부터 며느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형제나 동서 간에 주고받거나, 남편이 첩(妾)에게 재산을 별급하는 등 발·수급 관계가 매우 복잡하고 다양하다. 즉 상속이 아닌 증여인 만큼 부모 자식 간이라는 대상 설정의 정형성을 탈피하여 재산 소유자의 의사대로 재산을 줄 수 있는 범위와 대상을 정할 수 있었다.

한편 별급을 흔히 특정인에게 극히 적은 재산을 증여하는 것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노비 1~2명, 또는 전답(田畓) 1~2마지기 정도를 별급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별급이 재산 형성에 기여하는 정도는 사례별로 매우 큰 차이가 있다. 예컨대, 안동 광산김씨 집안의 김연(金緣)의 경우 1510년(중종 5)에 생원·진사 양시에 합격하고, 1519년(중종 14)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후 예문관직을 거쳐 강원도관찰사에 올랐고, 경주부윤을 지냈다. 그는 세 차례의 과거시험 합격과 그 이후 계속되는 관직 제수로 여러 차례 친지들에게 별급을 받았다. 그가 별급으로 받은 재산은 문서로 남아 있는 것만도 노비 43명, 토지 105마지기와 채전(菜田) 등에 이른다. 그가 부모 사망 후 정식으로 받은 재산 상속에서 노비 52명, 토지 110여 마지기를 받은 것과 비교하면 사전 증여를 통해 받은 재산이나, 정식 재산 상속으로 받은 재산이나 별 차이가 없다.

다른 사례로, 봉화 유곡(酉谷) 안동권씨 가문의 권사수(權士秀)는 조카 권벌(權橃)을 수양자로 삼았는데 조카이며 수양자인 권벌이 등과하자 등과 별급으로 노비 30명과, 밭 114.2복(卜), 논 118.8복을 주었다. 이렇게 많은 양의 재산을 별급할 수 있었던 것은 권사수에게 자녀가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렇게 별급은 자신의 능력이나 가문 내에서의 입지에 따라 지급받는 횟수나 분량이 결정된다고 볼 수 있으며, 따라서 많은 형제들 중 특정인에게만 집중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전체 재산 상속은 평균 분급(分給)의 방법으로 시행되었다 하더라도 별급으로 인해 전체 재산 분배에 있어서는 차등이 나타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이처럼 별급은 특정인의 재산 형성에 크게 기여할 수 있으며, 재산 형성을 위해 별급이라는 방식을 활용할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별급을 제외한 분급 문기나 화회(和會) 문기 같은 정식 재산 상속 문서만을 가지고 상속 방식이나 의미를 논할 수 없다.

변천

별급은 다른 재산 상속이나 증여와 마찬가지로 고려후기부터 시행되어 19세기까지 그 관행이 유지되었다. 특히 18세기부터 분급이나 화회 등 정식 재산 상속 문서가 거의 사라져가는 것과 달리 별급 문기는 꾸준히 작성되었다. 이는 재산 상속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별급 관행이 지속되었음을 의미한다.

참고문헌

  • 문숙자, 『조선시대 재산 상속과 가족』, 경인문화사, 2004.
  • 이수건 편, 『경북 지방 고문서 집성』, 영남대학교출판부, 1981.
  • 김용만, 「조선시대 균분상속제에 관한 일연구: 그 변화 요인의 역사적 성격을 중심으로」, 『대구사학』23, 1983.
  • 이문현, 「16세기의 별급관행(別給慣行): 황신가(黃愼家)의 사례를 중심으로」, 『고문서연구』14,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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