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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23 기준 최신판



조선시대 기로소에 입회한 원로들의 모임을 그린 기록화.

개설

기로소 소속의 문인 원로들의 모임을 기념하기 위해 그린 일종의 기록화이다. 기로소에서 ‘기(耆)’는 60세, ‘노(老)’는 70세를 뜻한다. 문과에 급제한 뒤 나이, 인격, 높은 관직을 갖춘 이라야 비로소 ‘기로(耆老)’라고 하였으므로, 과거를 거치지 않고 벼슬을 지낸 음관(蔭官)과 무관은 기로소에 입소할 수 없었다. 태종대에 기로소의 전신인 ‘전함재추소(前銜宰樞所)’를 두었고, 1428년(세종 10)에 ‘치사기로소(致仕耆老所)’로 명칭을 바꾸었다(『세종실록』 10년 2월 10일).

왕이 기로소에 입소하기도 하였는데, 태조가 1394년(태조 3)에 60세로 전함재추소에 입소하였고(『숙종실록』 45년 1월 10일), 이를 전례 삼아 1719년(숙종 45)에 59세를 맞은 숙종이 기로소에 이름을 올렸다(『숙종실록』 45년 2월 12일). 영조는 1744년(영조 20)에 51세로 기로소에 입사하였고, 1902년(광무 6)에 고종황제 역시 51세로 기로소에 입사하였다.

연원

기로회는 당나라 백거이(白居易)가 향산구로회(香山九老會)를 결성한 것에서 기원하였다. 즉, 관직에서 물러난 백거이가 향산으로 귀거래하여 친분 있는 노인들과 기로회를 결성하였는데, 향산구로회에 참가한 문인들은 풍류를 즐기고 모임을 기념하는 의미로 그림을 그리고 이름을 남겼다.

이후 송의 두연(杜衍)이 향산구로회의 전례에 따라 고향인 오양에서 기로들과 가진 수양오로회(睢陽五老會), 문언박(文彦博)이 낙양의 유수로 재임할 때 문인 11명과 가진 낙양기영회(洛陽耆英會)도 백거이의 전례에 따라 그림을 그렸다(『세종실록』 15년 1월 19일). 당·송대 모임은 이후 중국에서 전통으로 자리 잡게 되었고, 청대까지 기로들의 모임이 지속되었다.

한편 우리나라의 경우 고려시대 최당(崔讜)의 주도로 해동기로회(海東耆老會)가 결성되어 「해동기로회도」가 제작된 기록이 『세종실록』에 보인다(『세종실록』 15년 2월 21일). 최당은 1203년(고려 신종 6)에 자신의 서재 쌍명재(雙明齋)에서 전직 대신 8명과 함께 기로회를 열었다. 이때 이인로가 쓴 「제이전해동기로회도(題李佺海東耆老會圖)」를 통해 이전(李佺)이 기로회도를 그린 것을 알 수 있다. 이후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 전반에 걸쳐 기로회가 지속적으로 열리고 이를 기념한 기록화가 제작되었다. 중종대에는 문신들의 시험 제목으로 「기영회도(耆英會圖)」가 등장하기도 하였다(『중종실록』 29년 10월 21일).

변천

1. 조선초기

조선초기 기로회는 신말주(申末舟)가 1499년(연산군 5)에 당·송시대 기로회의 뜻에 따라 근방의 노인 9명과 함께 모임을 연 것을 기념하여 그린 것으로 전해지는 「십로계축(十老契軸)」을 통해 확인된다. 「십로계축」에서는 죽림칠현과 영계기도를 연상하게 하는 인물들을 차례로 그리고, 각 인물에 상응하는 시를 인물 상단에 각각 4행씩 칠언절구로 썼다. 1790년(정조 14)에 신말주의 10대손 신상렴이 강세황에게 부탁하여 모사(模寫)하여 제작한 『십로도상첩』에는 강세황의 서문과 발문, 김홍도가 모사한 십로도상과 제시가 있다.

2. 조선중기

기로회도는 많은 수가 전하지 않지만, 기로회도의 양식이 전형화된 유형과 인물 고사화 유형의 기로회도로 구분된다. 기로소의 연회와 70세가 되어 치사한 관리가 궤장을 하사받는 행사 등 공식적인 행사 장면을 그린 모습으로 정형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연회 장면이 부각된 기록화적인 화면 구상은 왕이 내린 선온(宣醞)을 기념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선온은 왕이 나라에 경사가 있거나 신하의 노고를 치하할 때 내리는 술이었다. 한편 고사화 유형의 기로회도는 전통적인 고사 인물화에서 배경을 차용하여 원로들의 성대한 기로회 모임을 묘사하였다.

먼저 전형적인 기로회도 유형으로 제작된 작품은 다음과 같다. 1584년(선조 17)에 홍섬, 박대립 등이 7명의 기로가 참여한 모임을 계회도 형식으로 그린 「기영회도」, 노수신, 정유길, 심수경 등 7인이 참여한 1585년(선조 18)의 「기영회도」가 전한다. 그리고 1621년(광해군 13)의 「기로소연회도」에는 정창연, 심희수 등 70세 이상의 원로대신 9명의 기로연의 연회 장면을 묘사하였다. 「남지기로회도(南池耆老會圖)」는 1629년 6월 숭례문 밖 남지 인근의 홍사효(洪思斅)의 집에서 70세 이상의 기로 12명이 참여한 기로회를 배경으로 그린 것이다. 전형화된 기로회도 양식으로 화원 이기룡(李起龍)이 그렸고, 장유(張維)의 제문, 참석자의 이름과 직책을 적은 좌목이 4단으로 구성되었다. 이후 1691년(숙종 17)에 박세당의 발문이 축 좌우에 이어 장황되었다. 「남지기로회도」는 축이나 화첩 형태로 제작되었고, 필사본과 석판 인쇄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후모본 7점이 전해지고 있다. 또한 이원익이 1623년(인조 1) 9월 궤장을 하사받고 동시에 기로연을 열었는데(『인조실록』 1년 9월 7일), 이를 배경으로 그린 「사궤장겸기로회도」가 전해지며, 1668년 이경석이 헌종에게 궤장을 하사받고 선온과 사악을 받아 사궤장연을 베풀어준 것을 기념하여 제작한 『사궤장도첩』이 전해진다.

한편 인물 고사화의 유형을 차용한 기로회도는 1599년(선조 32)에 심수경을 비롯한 30명의 시문과 그림으로 구성된 『기로연시화첩』이 수묵으로 그려져 전해진다. 그림 중 2점은 향산구로회와 난정수계를 그린 고사 인물화이다. 그리고 문월도(問月圖), 상산사호(常山四皓), 수노인(壽老人) 등을 소재로 그린 4점, 실내와 야외에서 열린 기로회를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2점의 그림이 함께 붙어 있다. 1689년(숙종 15)에 청록산수화풍으로 제작된 「기로연회도병(耆老宴會圖屛)」은 권대운(權大運)이 숙종에게 궤장을 하사받고 기로소에 입사한 것을 기념하여 4명의 원로가 연회에 참여한 것을 그린 것이다.

3. 조선후기

조선후기 기로회도는 왕에서부터 사대부, 중인에 이르기까지 기로회를 여는 계층의 범위가 확대되었다. 숙종과 영조의 기로소 입사는 기로회도의 제작 규모가 확대되는 계기가 되었다. 정형화된 유형의 기로회도 지속되지만, 기로소의 신축과 조선후기 풍속적 요소가 두드러진 것이 특징이다.

1719년(숙종 45)에 59세를 맞은 숙종은 태조가 기로소에 든 것을 전례 삼아 기로소에 입사(入社)하였고, 영조는 1744년(영조 20)에 51세로 기로소에 입사하였다. 기로신들은 숙종과 영조의 기로소 입사를 기념하여 각각 『기사계첩(耆社契帖)』과 『기사경회첩(耆社慶會帖)』을 제작하였는데, 이 작품은 조선시대 기로회도 중 가장 큰 규모로 제작되었다. 두 화첩에는 당대 최고의 화사들이 참여하여 당시 행사를 순차적으로 그리고, 국왕과 함께 입사한 기로신들의 반신상을 그려 넣었다. 『기사경회첩』은 영조가 숙종대의 『기사계첩』 전례를 따라 제작하게 한 것이라 두 화첩의 형식과 구성은 거의 유사하다.

1720년 12월 완성된 『기사계첩』에는 임방의 계첩 서문, 숙종의 「경현당석연(景賢堂錫宴)」, 민진후의 어첩 발문, 행사 참여 기로신 명단, 「어첩봉안도」, 「숭정진하전도」, 「경현당석연도」, 「봉배사귀사도(奉杯歸社圖)」, 「기사사연도」, 좌목, 기로신 반신초상화, 기로신 자필 축시, 실무자 명단 등으로 구성되었다(『숙종실록』 45년 4월 18일) (『숙종실록』 45년 6월 24일). 한편 1745년(영조 21)에 제작된 『기사경회첩』은 기로소 입사일에 쓴 영조의 어제에(『영조실록』 20년 9월 9일) 기로신의 차운시, 영조의 「경현당 석연」, 기로신의 연구(聯句), 행사 참여 기로신 명단, 「영수각친림도」, 「숭정전진하전도」, 「경현당선온도」, 「사악선귀사도(賜樂膳歸社圖)」, 「본소사연도」, 기로신 반신초상화, 이성룡의 발문, 실무자 명단 등으로 구성되었다.

1724년(경종 4)에 제작된 『갑진기사연회첩』은 왕대비의 병환 회복을 축하하기 위해 경종과 왕세제가 진연을 올린 이튿날 6명의 기로신들이 기로소에 모여 연회를 연 것을 기념한 것이다. 『이원기로계첩(利園耆老契帖)』은 1730년(영조 6) 4월 장악원[利園]에서 열린 기로회를 기념하여 제작한 계첩이다. 또 1765년(영조 41) 영조가 즉위한 지 41년을 기념하여 영수각에서 전배하고 기영관(耆英館)에서 기로연을 베푼 것과 같은 해 10월 영조의 망팔(望八), 즉 칠순을 기념하여 수작례를 행한 장면을 그린 「영조을유기로연 경현당수작연도병(景賢堂受爵宴圖屛)」이 있다(『영조실록』 41년 8월 28일) (『영조실록』 41년 10월 11일).

그밖에 정수영(鄭遂榮)이 1784년 12월에 백사회원(白社會員) 중 14명의 노인들이 모인 것을 그린 「백사동유도(白社同遊圖)」, 홍필우(洪必遇)가 1803년(순조 3) 7월에 송대 두연의 고사를 본받아 오로회를 결성한 것을 배경으로 그린 「오로회도」가 있다.

4. 조선말기

1902년(광무 6)에 고종이 51세로 기로소에 입사한 것을 기념하여 제작한 『임인진연도병(壬寅進宴圖屛)』은 영조대의 전례를 따른 것이다. 인물들의 복식과 태극기 등에서 대한제국기의 시대 상황을 반영하였다.

조선말기에는 중인들의 기로회 모임도 자주 보인다. 특히 여항 문인들이 남긴 기로회도는 중국 당·송대의 전통을 계승한 것을 드러내기 위해 고식적인 표현을 취하기도 하였다. 김준영(金準榮)이 1865년(고종 2)에 그린 「구로고회도(九老高會圖)」는 9명의 노인이 차를 즐기며 서책과 거문고로 풍류를 즐기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또한 1861년(철종 12)에 유최진의 저택에서 조희룡을 비롯한 벽오사의 원로 5명이 오로회를 가진 것을 기념하여 유숙(劉淑)이 그린 「벽오사소집도(碧梧社小集圖)」가 있다.

참고문헌

  • 박정혜, 「조선시대 사궤장도첩과 연시도첩」, 『미술사학연구』 231, 미술사학연구회, 2001.
  • 오민주, 「조선시대 기로회도 연구」, 고려대학교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9.
  • 위순선, 「조선시대 남지기로회도 연구」, 동아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2.
  • 유옥경, 「1585년 선조조 기영회도 고찰」, 『동원학술논문집』 3집, 한국고고미술연구소,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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