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연사(萬淵寺)"의 두 판 사이의 차이
(XML 가져오기) |
(차이 없음)
|
2017년 12월 10일 (일) 02:22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
대표표제 | 만연사 |
한글표제 | 만연사 |
한자표제 | 萬淵寺 |
상위어 | 자복사(資福寺) |
관련어 | 만연(萬淵), 나한산(羅漢山), 총남종(摠南宗) 자복사찰(資福寺刹), 철안(澈眼), 조계종(曹溪宗), 원효사(元曉寺), 송광사(松廣寺) |
분야 | 문화/종교/불교 |
유형 | 개념용어 |
지역 | 전라남도 화순군 화순읍 |
시대 | 고려~현재 |
집필자 | 윤기엽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만연사(萬淵寺)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태종실록』 7년 12월 2일 |
태종대 88개 자복사 가운데 하나로, 전라남도 화순군 화순읍만연산에 있는 절.
개설
만연사(萬淵寺)는 1208년(고려 희종 4) 만연(萬淵)선사(禪師)가 절을 창건했다는 설화가 전해온다. 조선 태종 때 총남종의 자복사찰(資福寺刹)로 지정되었다. 18세기 말 정조 때 절에 불이 나 일부 전각이 소실되었고, 이듬해 다시 절을 중건하였다. 6·25전쟁 전까지는 많은 전각을 갖춘 큰 사찰이었지만 전쟁 때 대부분 소실되었다. 1978년 주지 철안(澈眼)이 중창하여 대웅전을 비롯한 주요 전각을 복원하였다.
내용 및 변천
(1) 창건
1208년(고려 희종 4)에 선사 만연(萬淵)이 창건하였다. 만연사에는 다음과 같은 창건 설화가 전해온다. 만연이 광주무등산의 원효사(元曉寺)에서 수도를 마치고 조계산송광사로 돌아오는 길에 지금의 만연사(萬淵寺) 나한전이 있는 골짜기에 이르러 잠시 쉬다가 잠이 들었다. 16나한이 석가모니불을 모실 역사를 하고 있는 꿈을 꾼 후 깨어서 주위를 둘러보니 눈이 내려 온 누리를 덮고 있었는데, 그가 누웠던 자리 주변만은 눈이 녹아 김이 나고 있었다. 만연은 이것을 경이롭게 생각하여 그곳에 토굴을 짓고 수도하다가 만연사를 창건했다고 한다.
또 다른 설화도 있다. 옛날에는 만연산을 나한산(羅漢山)이라 하였다. 이곳에는 암자가 많았는데, 그 가운데 한 암자에 만연이라는 예쁜 상좌가 있었다. 한 승려가 만연을 사모하여 숲으로 끌고 가 겁탈하였고, 이에 만연은 목숨을 끊었다. 그 날 승려의 꿈에 만연이 나타나서 "나는 나주목사의 아들로 태어날 것이며, 너는 평생 죄를 면치 못할 것이니 나한산을 떠나라."고 하였다. 승려가 나주목사를 찾아가니 정말 아이가 태어나 있었고 아이의 부모도 똑같이 만연의 꿈을 꾸었다고 하였다. 꿈에 사미승이 나타나 자신은 화순나한산에서 공부하던 몸이나 억울하게 죽어서 환생했다는 것이다. 이에 나주목사는 아들 만연을 위해 만연사라는 절을 지었으며, 나한산이라는 산 이름도 만연산(萬淵山)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2) 조선전기
조선시대에 들어와 1407년(태종 7) 12월 전라도 화순(和順) 만연사가 총남종의 자복사찰로 지정되었다(『태종실록』 7년 12월 2일). 당시 조선시대의 불교 종파는 이전 11개(혹은 12개)에서 조계종(曹溪宗), 천태종(天台宗), 화엄종(華嚴宗), 자은종(慈恩宗), 중신종(中神宗), 총남종(摠南宗), 시흥종(始興宗) 등 7개 종파로 정리되었는데, 만연사는 총남종에 소속된 자복사찰이었다. 자복사찰은 나라와 고을의 복을 기원하기 위해 지정한 사찰을 말한다. 고려후기에 창건된 만연사가 조선 초에도 지방의 명찰(名刹)이었음을 알 수 있다.
(3) 조선후기
『창의일지(倡義日誌)』에 의하면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만연사의 승려들이 군중일지(軍中日誌)에 필요한 종이 및 주식, 부식 등을 조달해 외적 방어에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1793년(정조 17) 9월 전각 일부가 불에 탔고, 이때 고려 때부터 전해오던 진언집(眞言集) 판각이 불에 탔다. 다음 해인 1794년(정조 18) 경관(慶冠)이 절을 중건하였다.
(4) 근현대
개화기와 일제강점기에는 명창(名唱)들이 수학하던 곳으로 이름이 났다. 명창으로 알려진 이날치, 이동백, 임방울, 정광수 등의 예술인이 이곳에서 창을 공부했다. 6·25전쟁 이전까지 대웅전, 시왕전, 나한전, 삼청각, 사리각 등의 전각을 비롯해 승당, 선당, 동상실, 서상실, 동병실, 서별실, 수정료, 송월료, 설루, 사천왕문 등과 같은 건물이 있는 큰 사찰이었다. 이 중 사리각은 보조지눌(普照知訥)의 사리를 모셔 둔 건물이었다고 한다. 또한 산내 암자로 학암당, 침계당, 동림암, 연혈암 등이 있었다. 그러나 6·25전쟁 때 거의 모든 건물이 전소되었다. 1978년부터 4년에 걸쳐 주지 철안(澈眼)이 중창하여 대웅전, 나한전, 명부전, 한산전, 요사채를 복원하였고, 암자로는 선정암(禪定庵)과 성주암(聖住庵) 등이 있다.
문화재
만연사괘불탱(萬淵寺掛佛幀, 보물 제1345호)은 1793년(정조 7)에 제작된 괘불(掛佛)로 크기가 길이 821㎝, 폭 624㎝이고, 중앙에 석가모니불과 좌우에 문수보살, 보현보살을 배치한 석가삼존불 형식으로 되어 있다. 18세기 말의 작품이지만, 전통을 따르면서도 화려한 문양과 짙은 채색, 유려한 필선 등이 잘 어우러져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외에도 만연사 창건을 기념하여 진각(眞覺) 국사(國師)가 심었다는 수령 770여년 된 전나무, 고려말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삼존불·시왕상[十王像]·16나한상 등이 있다.
참고문헌
- 『가람고(伽藍考)』
- 『창의일지(倡義日誌)』
- 권상로, 『한국사찰전서』, 동국대학교출판부, 1979.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