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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22 기준 최신판



일제가 대한제국 황실의 대외적 이미지를 격하시키고 전통적 궁궐을 왜곡시키고자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개칭 후 조성한 동물원.

개설

창경궁은 창덕궁의 이궁(離宮)으로 조선 건국 초부터 역대 국왕과 왕비들이 거처하던 유서 깊은 궁궐이었다. 일제는 조선 왕실의 역사와 전통이 상징적으로 배어 있는 창경궁을 공원화하여 정치적 이미지를 격하시키고자 하였다. 특히 역대 왕실의 위엄이 남아 있는 궁궐 내에 동물들의 축사를 만들어 유희용으로 삼았다.

내용 및 특징

1907년(융희 1) 고종이 헤이그특사를 파견한 것을 빌미로 일제는 순종에게 강제 양위를 하도록 강요하였다. 또한 일제는 내각은 물론 궁내부 관제도 변경하여 각 차관에 일본인이 임용될 수 있게 하였다. 이른바 차관정치를 개시하면서 궁내부 차관으로 고미야 사보마츠[小宮三保松]를 임명하였다. 고미야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최측근으로, 박물관·동물원·식물원에 대한 사무를 관장하는 어원사무국(御苑事務局) 총장을 겸임하였다. 창경궁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두려고 한 것이 이완용(李完用)의 주청에 따라 순종이 재가한 것이라고는 하나 애초부터 창경원 조성을 기도한 것은 이토 히로부미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대한제국 황실의 위락과 위엄을 위해 어원(御苑)을 시설한다고 하고 1909년(융희 3) 11월 1일 개원식(開苑式)과 함께 일반 공개를 하였으며 곧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개칭하였다(『순종실록』 2년 11월 1일). 역대 조선왕조의 궁궐 공간을 유원지화하려는 의도는 조선왕조의 몰락과 식민제국 일본의 이미지를 홍보하는 수단이었다. 따라서 창경궁에 동물원을 설치하여 순종 및 황실을 위한다고 한 것은 명분이었고, 대외적으로 대한제국 황실의 위엄을 격하시키려는 의도에서 나온 계책이었다.

1908년(융희 2) 8월 13일 어원사무국 관제가 공표되고 동물 전문가 시모고리야마 세이이치[下郡山誠一]와 오카다 노부토시[岡田信利], 식물 전문가 후쿠와 온조[福羽恩藏] 등을 초빙하여 동물원과 식물원 조성의 실무 기술자로 임명하였다. 1910년(융희 4) 일본이 한국을 강제로 병탄한 이후에 창경원은 이왕직에서 직접 관리하던 이왕가 소속의 공원이었다. 이왕직은 일본 황실의 하부로 재편입된 대한제국 황실 가족을 관리하던 부서이다. 창경원은 박물관, 식물원, 동물원의 3개 부서로 구성되었다.

동물원의 축사에서 동물 온실은 당시 동양 최고의 시설이었다. 1912년에 준공된 동물 온실은 하마와 코끼리를 수용하였다. 하마는 1912년 독일에서 1쌍이 수입된 후 계속 번식하여 창경원 동물원을 하마 동물원이라고 부를 만큼 유명하였다. 창경원은 55,000평으로 동물 축사가 넓어서 동물의 사육과 활동에 좋았다. 특히 동물 중에 일본에는 없는 호랑이와 표범이 있는 것도 자랑이었다. 또한 1918년에 완공된 큰물새장은 1945년 해방 이전까지 단일 물새장으로는 동양 최대이면서 기능적으로도 우수하였다. 큰물새장은 하마와 함께 동물원의 상징이었다. 창경원의 안내문에 실렸던 창경원 12경에는 7월 큰물새장, 9월 온실 안의 하마라고 할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위치

창경원 동물원은 창경원 남쪽에 위치하였다. 창경원 입구인 홍화문(弘化門)을 들어서면 좌측이 동물원이었다. 관람객은 대개 입구에서 좌측으로 돌아 동물원을 우선 구경하였다. 이어서 박물관과 식물원, 춘당지에 이르는 관람 동선을 이어갔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동아일보(東亞日報)』
  • 『매일신보(每日新報)』
  • 곤도 시로스케 지음·이언숙 옮김, 『대한제국 황실비사』, 이마고, 2007.
  • 이왕직, 『창경원 안내』, 1934.
  • 김현숙, 「창경원 밤 벚꽃놀이와 야앵(夜櫻)」, 『한국근현대미술사학』제19집, 2008.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