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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21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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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도기소 |
한글표제 | 도기소 |
한자표제 | 陶器所 |
관련어 | 도자소(陶磁所), 자기소(磁器所) |
분야 | 문화/예술/미술 |
유형 | 개념용어 |
시대 | 조선시대 |
왕대 | 조선시대 |
집필자 | 엄승희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도기소(陶器所) |
조선시대에 각종 그릇을 번조한 곳.
개설
조선시대에는 도자기를 제작하는 곳을 도기소(陶器所)와 자기소(磁器所)라고 불렀다. 도기소는 흔히 도기나 옹기를 구워낸 곳을 지칭하였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실제 기록에 보이는 가마터를 조사해본 결과 도기·옹기보다는 분청사기를 제작했던 곳으로 확인된다. 도기소에서 구워진 도자기의 기종이나 유형은 불분명하다.
조선시대 도기소는 관요 분원이 설치되기 이전까지 점진적으로 규모가 확대되었다. 특히 15세기 전반에는 중부 이남 지역에 집중적으로 도기소, 자기소가 밀집되는 경향을 보였다. 이 점은 『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된 전국의 도기소와 자기소 위치 및 분포를 통해 알 수 있다. 중부 이남 지역의 밀집 현상은 가마 번조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인 연료와 태토(胎土)의 수급이 편리하고 아울러 수요자가 중부 이북보다 많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한, 『세종실록』「지리지」에 총 도자소 수가 324개에 달한다는 내용으로 미루어 짐작건대 당시 도자소의 수적 팽창이 절정에 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5세기 후반에 접어들어 전국의 도자소는 49개에 불과할 정도로 급격하게 감소하였다. 그 변화의 요인은 사옹원 소속 사기장 380명이 경기도 광주 관요에 소속되어 어용자기(御用磁器)의 제작을 본격화하였기 때문이다.
내용 및 특징
도기소는 조선시대에 도자기를 굽던 곳을 일컫는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수록된 내용 중 도자와 연관된 내용으로 가장 주목되는 것이 도기소와 자기소에 관한 것이다. 지리지에 의하면, 도기소의 각 가마는 조선 팔도의 부(府)·목(牧)·군(郡)·현(縣)의 관청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으로 표기하고, 품질에 따라 상품(上品)·중품(中品)·하품(下品)·무품(無品) 등으로 명시하였다. 이를 통해 전국에 분포한 도기소의 위치와 수, 품질 등을 세분하여 파악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자기소와의 비교도 가능하다. 따라서 『세종실록』「지리지」는 조선시대 도자사 연구에서 매우 중요한 사료로 다루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자료는 당시의 각 지방 명칭이 대부분 현재 지명과 일치하지 않아 고증에 어려움이 있으며, 자기와 도기를 구별하는 뚜렷한 기준마저 없어 도기소와 자기소 전반을 구체적으로 이해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현재까지 발굴 자료를 토대로 할 때, 도기소에서는 도기·옹기보다는 분청사기가 상대적으로 많이 구워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문헌 기록에 옹(甕)과 와(瓦) 자가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지역별로 옹기 계통의 그릇이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반면 학계의 일반적인 견해는 도기소에서 백자 생산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본다. 도기소는 현재의 개념으로 생각하는 것과 달리 도기만 생산하는 곳이 아니며, 분청사기와 그 밖에 일부 다른 재질의 기물들도 동시에 생산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분청사기는 자기소에서도 출토되어 자기소, 도기소 양쪽에서 동시에 구워졌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분청사기의 품질에 따라 제작처가 구분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현재까지 전국의 도요지 발굴 조사를 통해서는 도기소와 자기소의 운영 실체를 구체적으로 파악하기 힘든 실정이다. 이 부분에 대한 지속적인 연구 조사가 필요하다.
변천
조선시대에는 각종 도자기를 굽는 곳을 도기소와 자기소로 칭하였다. 도기소는 조선시대에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 등 각종 지리지에 등장하는 용어이며, 특히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도기소와 관련된 내용이 많이 서술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는 1432년(세종 14)에 완성된 조선시대 최초의 관찬지지(官撰地誌)인 『신찬팔도지리지(新撰八道地理誌)』의 기본 내용에 새로운 기록을 첨가하여 1454년(단종 2)에 간행된 『세종실록』의 부록이다. 이 간행물에 조선전기의 도기소와 자기소의 통계를 내고 전국 각지의 도자 생산 분포도를 조사한 기록을 자세하게 수록하였다. 또한 1424년(세종 6)에 자료 조사에 착수하여 1425년(세종 7)에 완성된 『경상도지리지』의 도자 관련 내용이 『세종실록』「지리지」와 거의 동일하다는 점에서 매우 주목된다. 아마도 『경상도지리지』를 편찬할 무렵에 시작된 조사 내역이 이후 『세종실록』「지리지」 편찬에 모두 집대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표기된 도기소는 상품·중품·하품으로 품질의 등급을 분류하였고, 전국팔도를 구분하여 도기소의 수와 각각의 위치 및 품질 등급을 표시하였다. 도기소는 상품 생산지는 전혀 없으며, 중품 생산지는 충청도가 30개로 가장 많고, 경상도 28개, 전라도 23개로 뒤를 이었다. 이러한 전국의 도기소 생산지는 총 185개로 집계되어 자기소 139개에 비해 50여 개 안팎으로 많았다.
도기소라고 불린 것으로 볼 때 도기와 옹기를 주종으로 생산한 곳으로 추정되지만, 실제 기록에 등장하는 가마터의 발굴품들을 살펴보면 분청사기를 주로 제작한 곳이 많아, 명칭에 관한 문제는 재고의 여지가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수록된 도기소와 자기소의 총수가 324개에 달하는 것은 고려말부터 조선초기에 이르기까지 도자기 제작이 원활했으며 가마의 수가 현저하게 증가했음을 시사한다. 또한 도자기 수요가 증가했다는 것은 조선전기의 정치, 사회 전반이 안정되게 발전하고 있음을 대변한다. 특히 세종 연간에는 경제뿐만 아니라 문화, 예술, 학술 전반에서 매우 융성한 결실을 거두는 시기였으므로 도자기 생산이 활성화될 수 있었다. 그러나 분원 관요가 설치된 이후부터는 도기소와 자기소의 감소 현상이 뚜렷해져서 관요의 설치가 도기소와 자기소의 전개에 있어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15세기 중엽을 전후한 시점에 도기소와 자기소가 감소한 사실은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誌)』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먼저 『경상도속찬지리지』의 경우, 수록된 경상도 일대의 도자소 수가 『세종실록』「지리지」에 비해 자기소 3곳이 줄어들었다. 또한 15세기 후반에 이르면 도자소와 자기소의 수가 전국적으로 49개에 불과할 정도로 급격한 감소 추세를 보이는데, 이 사실은 『신증동국여지승람』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이처럼 경기도 광주 관요에서 본격적으로 어용자기를 제작하기 시작하면서 전국의 도자소 운영이 영향을 받았고, 이에 그 규모가 상당히 줄어든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
-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誌)』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강경숙, 『한국 도자사의 연구』, 시공사, 2000.
- 김영원, 『朝鮮前期 陶磁의 硏究―分院의 設置를 中心으로』, 학연문화사, 1995.
- 김영원, 『조선시대 도자기』, 서울대학교출판부, 2003.
- 방병선, 『왕조실록을 통해 본 조선도자사』, 고려대학교출판부, 2005.
- 박경자, 「朝鮮 15세기 磁器貢納에 관한 硏究」, 충북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 박정민, 「조선 전기 명문백자 연구」, 명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4.
- 전승창, 「15~16세기 조선시대 경기도 광주 관요연구」, 홍익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8.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