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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21 기준 최신판



도학 전수의 계통을 이르는 말.

개설

도통은 유학에서 도학 전수의 계통을 말하는 것으로서 오랜 전통이 있었다. 이 도통 관념은 도학 전승의 일관성과 계통성을 분명히 함으로써 정학과 이단을 구분하고 학문의 정통성을 확고히 하는 데 중요한 이념적 도구로 활용되었다. 특정한 학파와 인물들을 도통의 관념에 입각해 정통적인 학문이나 인물로서 제시함으로써 정치권력의 정당성을 내세울 수 있었다. 그러한 점에서 도통 관념은 정치권력과 긴밀한 관련성을 가졌다. 조선시대에 도통 관념은 문묘 종사 문제와 결합하면서 많은 정치적 쟁론을 양산하였다. 즉, 어느 인물을 문묘에 종사할 것인가를 놓고 각 당파 사이에서 여러 가지 쟁론이 발생한 것이다. 이는 문묘 종사가 도통 관념과 밀접한 관련성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용 및 특징

도통설은 맹자(孟子)에게서 그 연원을 찾아볼 수 있다. 맹자는 도가 요순(堯舜)에서 탕(湯)으로, 탕에서 문왕(文王)으로, 문왕(文王)에서 공자(孔子)로 이어져왔다고 보았다. 이후 이러한 도통 관념은 다시 당나라한유(韓愈)의 「원도(原道)」에서 재확인된다. 한유는 요에서 순으로, 순에서 우(禹)로, 우에서 탕으로, 탕에서 문·무·주공(文·武·周公)으로, 문·무·주공에서 공자로, 공자에서 맹자로 이어지는 도학의 전수를 언급하였다. 이러한 도통 관념이 체계화되는 시기는 송나라 때이다. 송나라 지식인들은 오대십국의 혼란을 극복한 중화왕조로서의 자부심을 강조하면서 중국 문화를 계통화시켜 이해하고자 하였고, 그 과정에서 도통 관념이 강화되고 발전하였다.

이 시기에는 도통 관념뿐만 아니라 역사서술에 있어서 『자치통감』과『자치통감강목』에서 보이는 것처럼 정통론도 유행하였다. 도통과 정통 관념은 송대 문화의 특수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도학의 계보를 정리하여 도통 관념을 확고히 한 이는 주희(朱熹)이다. 도통이라는 말은 주희의 「중용장구서(中庸章句序)」에서 최초로 사용되었다. 엄격히 말해서 도통은 주희가 만들어낸 조어였던 것이다. 그의 도통 관념에서 중요한 점은 도학 전수의 정치적 계보를 학문적 전승의 계보로 전환시켰고, 자신을 그 도통의 마지막에 두었다는 것이다. 그는 요순에서 이정자(二程子)로 일컬어지는 정호(程顥)와 정이(程頤)에게로 도학이 전승되었고, 이정자에서 자신에게 도학이 전수되었다고 언급하였다.

이러한 주희의 시도는 그의 사후 원나라대에 주자성리학이 국가에서 공인한 교학으로 자리 잡으면서 공식화되었다. 도통 관념이 국가의 정치권력과 만나면서 공적인 설득력을 얻게 된 것이다. 도통 관념이 정립된다는 것은, 도통 이외의 것들은 곧 배제되거나 최소한 관심 밖의 것이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는 도통 관념의 배타성과 폐쇄성을 말해준다. 그러한 이유로 자연스럽게 도통의 전수를 놓고 논쟁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변천

도통에 관한 사상적, 정치적 논쟁을 잘 보여주는 사례가 조선시대 문묘 배향 논쟁이다. 문묘는 공자를 받드는 사당으로서 주자성리학의 입장에서 보면 도통의 상징적인 공간이었다. 조선의 문묘에는 안자(顔子), 증자(曾子), 자사(子思), 맹자를 배향하고 공자 문하의 10철(哲) 및 송나라 6현(賢)과 신라·고려·조선시대의 명현(名賢) 18현을 모셨다. 문묘에 누가 배향되느냐는 곧 도통을 통해서 현실에 구현되는 정치권력이 어느 사람에게 혹은 어느 당파, 학파에게 가느냐를 의미했다. 따라서 도통은 그것이 처음부터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정치적인 논쟁을 야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사실 주희가 정치적 계승을 학문적 계승으로 전환시킨 것에서부터 이미 발생할 수 있는 문제였다. 곧 정치와 학문 간의 긴밀한 결합점이 도통 관념에는 있었던 것이다.

성리학적 세계를 건설하고자 했던 조선은 왕조 초기부터 문묘 배향 문제를 논의했으나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 그러다가 중종대 사림층에 의해서 정몽주(鄭夢周)의 문묘 배향이 마침내 성사되었다. 사림층의 주도로 정몽주를 문묘에 배향하면서 마침내 정몽주를 상징으로 하는 조선의 도학적 전통이 마련되었다. 정몽주를 문묘에 배향한 정치세력은 조광조(趙光祖)로 대표되는 사림층이었다. 정몽주의 문묘 배향은 충절과 절의를 중시한 그들의 학문 배경이 반영된 결과였다.

이후 문묘 배향에 대한 논의는 동방 5현의 배향으로 이어졌다. 이 논의를 주도한 것은 영남 지역을 기반으로 한 사림층이었고, 구체적으로는 이황(李滉)의 제자들이었다. 그들은 동방 5현이라고 불리는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조광조, 이언적(李彦迪), 이황을 문묘에 종사시키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이러한 노력으로 광해군대에 5현은 문묘에 배향되지만(『광해군일기』 2년 9월 5일), 곧 문제가 발생하였다. 정인홍(鄭仁弘) 등 대북 세력은 이른바 ‘회퇴변척소(晦退辨斥疏)’를 올려 이언적과 이황을 문묘에서 퇴출시키고자 하였다(『광해군일기』 3년 3월 26일). 하지만 이러한 시도는 실패하였고, 오히려 정인홍이 이황 제자들에 의해서 성균관 유생의 명부인 『청금록(靑衿錄)』에서 이름이 삭제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동방 5현의 배향이 주로 이황의 제자들로 구성된 남인 세력들에 의해서 주도되었다면 이후 문묘 배향 논의는 서인과 노론에 의해서 주도되는 모습을 보였다. 서인은 인조반정 이후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문묘 배향을 추진하였다. 이에 대해서 경쟁관계에 있던 남인은 이이가 불교에 귀의했던 전력을 문제 삼았고, 성혼의 경우에는 동인인 최영경(崔永慶)의 억울한 죽음을 방관하고 임진왜란 당시 선조의 행차가 자신의 집 앞을 지나는데도 나와 보지 않았던 점을 지적하면서 그들의 문묘 종사를 반대하였다. 하지만 서인이 정치권력을 장악하게 되면서 그들의 문묘 종사는 결국 성사되었다. 이후 숙종대 남인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한때 출향되기도 하였지만, 1694년(숙종 20)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정치권력을 다시 잡으면서 두 사람의 문묘 종사가 확정되었다(『숙종실록』 20년 6월 23일).

인조반정 이후에는 서인-노론 계열이 권력을 확고히 장악하면서 문묘 종사 논의도 이 세력을 중심으로 흘러갔다. 1717년(숙종 43)에 김장생(金長生)이 문묘에 종사되고, 이후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 박세채(朴世采)의 문묘 배향이 논의되었다. 하지만 이 문제는 상당한 갈등을 예고하였는데, 그 이유는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된 상황에서 이들 인물의 평가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지기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송시열, 송준길은 노론의 지지를 받았고, 박세채는 소론의 지지를 받았다. 따라서 그들의 문묘 배향 문제 또한 당파의 이해관계에 따라서 부침을 거듭하였다. 송시열과 송준길이 문묘에 배향되는 것은 1755년(영조 31) 을해옥사로 소론이 몰락하고 노론이 확고부동한 정치권력을 장악하는 1756년(영조 32)이었다(『영조실록』 32년 2월 1일).

박세채의 문묘 배향 또한 1764년(영조 40) 임금의 특별 명령으로 승인했다(『영조실록』 40년 3월 1일). 여기에는 영조가 박세채의 탕평론을 지지하고, 이를 통치이념의 방향으로 삼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던 듯하다. 이후 노론에 의해서 조헌(趙憲)과 김집(金集)의 문묘 배향이 추진되지만, 영조는 더 이상의 논의를 금지시키고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 논의는 정조대에도 제기되지만, 정조는 오히려 김인후(金麟厚)가 문묘에 종사되지 않은 것을 문제 삼아 그를 문묘에 배향시켰다(『정조실록』 20년 9월 17일). 이는 호남 지역 사림에 대한 배려였다. 조헌과 김집의 문묘 배향은 1883년(고종 20)에 마침내 성사되었다(『고종실록』 20년 10월 24일).

참고문헌

  • 정성희, 「조선 도통론의 비판적 검토-김종직을 중심으로-」, 『유교사상연구』31, 2008.
  • 최연식, 「조선시대 도통(道統) 확립의 계보학」, 『한국정치학회보』제45집 제4호,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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