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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18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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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가화 |
한글표제 | 가화 |
한자표제 | 假畵 |
관련어 | 가화백자(假畵白磁) |
분야 | 문화/예술/미술 |
유형 | 개념용어 |
시대 | 조선시대 |
왕대 | 조선시대 |
집필자 | 엄승희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가화(假畵)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광해군일기』 10년 윤4월 3일 |
완성된 순백자에 그림을 붙여 장식하거나 초벌구이를 한 백자 위에 그림을 묘사하고 재벌구이를 거치지 않고 완성시키는 자기 제작 기법.
개설
가화(假畵)는 조선중기에 백자 생산이 전반적인 위기를 맞으면서 청화 안료를 대신하여 사용할 수 있는 대체 기법으로 등장하였고, 실제 사용 기록이 일부 전해진다. 백자에 가화를 활용하기 시작한 것은 임진왜란 발발 무렵인 16세기 후반부터 17세기에 접어들어서였다. 조선중기는 임진왜란을 시작으로 청화백자 제작에 엄청난 타격과 피해를 입었고, 이후에도 국가 재정이 좋지 못하고 청화 안료의 조달이 힘들어져 전란(戰亂)이 끝나고도 백자 생산에 어려움을 겪었다. 임진왜란은 조선왕조의 존립 자체를 위태롭게 한 사건으로 조선의 역사는 이 전란을 기점으로 정치는 물론 경제, 상공업, 문화 예술 전반에서 크게 변화하였다. 요업 역시 회복하기 힘든 수준이 되어 분원(分院)이 정상적으로 운영되지 못했다. 이에 왕실과 연례(宴禮)에서 사용할 그릇인 청화백자가 부족한 상황이 되었고, 마침내 백자에 가화를 쓰게 되었다. 이후 17세기 중엽부터 서서히 요업의 복구가 이루어져 일부 가마의 경우에는 활발하게 생산 활동을 했다. 하지만 가화의 사용은 인조 연간에도 간헐적으로 계속되어 청화백자 생산이 완전하게 회복되지 못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내용 및 특징
가화는 임진왜란이 시작되면서 청화백자 생산 전반에 문제가 발생하자 대체 기법으로 활용되었고, 정유재란 이후 조선 사회의 질서가 바로잡히고 상공업계의 회복이 이루어지는 동안에도 간헐적으로 사용되었다. 이전까지는 중국을 다녀 온 사신들이 청화 안료를 구입하여 국내에 들여와 사용하였다. 그러나 전란 이후 국가적으로 재정난에 시달리면서 중국으로부터 청화 안료를 수입하는 것이 수월하지 못하게 되었고, 이에 청화백자 제작 전반에 큰 어려움이 따랐다. 이러한 상황에서 청화백자를 제작하는 데 꼭 필요한 청화 안료를 대신하게 된 것이 가화였다.
현재 가화의 사용법과 용도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추정은 할 수 있다. 우선 가화 기법은 종이나 비단에 그림을 묘사한 후 이를 백자 표면에 부착하여 화준(花罇)으로 완성하는 경우와, 초벌한 백자에 먹과 안료 등을 활용하여 그림을 묘사한 후 재벌을 거치지 않는 경우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두 가지 방법의 실제 활용도는 가늠하기 어렵다. 다만 인조대의 기록을 살펴보면, “가화 용준(龍罇)을 운반할 때 문양이 흩트려지고 손상되었다.”고 하였는데, 여기서 운반된 용준이 초벌 후 그림을 묘사한 경우라고 추정할 수 있으며, 이 기법의 활용도가 보다 수월하고 대중화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가화 기법으로 제작된 용준·화준 등은 인조 연간까지도 간헐적으로 사용되었으나 이 무렵에 가화 청화백자를 대신할 수 있는 중국산 화룡준(畵龍罇)이 수입되었고, 철 안료로 묘사한 철화백자가 이를 대체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점들로 미루어보면, 당시는 가화가 반드시 청화백자 제작에 동원된 기법은 아니었으며, 가화를 대체할 수 있는 다른 방안들이 왕실과 분원을 중심으로 새롭게 모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전반적으로 가화 기법으로 제작된 백자는 실생활에서의 활용도가 매우 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초벌구이와 재벌구이를 거친 청화백자와는 품질 면에서 비교 대상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다만 청화백자 제작이 순탄하지 않았던 당시 상황을 고려한다면 임시방편으로 활용될 만한 기법이었다.
변천
1592년(선조 25)에 발발한 임진왜란에 의해 전 국토가 피폐해지면서 백자 생산은 심각한 차질을 빚었고, 임시방편으로 가화 기법을 사용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가화에 관한 기록으로 광해군대에 왕실 연례에 사용할 청화백자가 없어 부득이 가화로 대신한다는 내용이 전해진다(『광해군일기』 10년 윤4월 3일). 또한 이 기록에 따르면, “사옹원에서 조정의 연향용 화준이 난리를 치른 후에 하나도 남아 있지 않고 청화 안료를 구해다 번조하려 했지만 구입할 방도가 없었다.”고 전하여 여전히 청화 안료 구입이 난처한 상황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기록을 토대로 한다면 1606년(선조 39)부터 요업 활동을 시작한 탄벌리 가마의 백자 생산도 그다지 순조롭지 못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즉 백자의 생산량이 감소되고 품질도 저하되었으므로 청화백자의 생산도 이와 더불어 순탄하지 못했을 것이다. 청화백자는 17세기에 접어들어서는 거의 제작되지 못하다가 1640년(인조 18)에 요업 활동을 시작한 선동리 가마에 이르러 소량 번조된 것으로 확인된다.
이처럼 가화는 전란으로 사회 전반에서 타격을 받고 이러한 상황이 요업에도 영향을 미치면서 청화백자의 문양 장식을 대체할 수 있는 기법으로서 활용되었다. 활용 기간은 임진왜란이 발발한 무렵을 전후하여 청화백자 항아리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시기에 등장했으며, 전란이 마무리되고 나서도 청화백자 생산이 정상화될 때까지 어느 정도 사용되었다.
참고문헌
- 김영원, 『朝鮮前期 陶磁의 硏究―分院의 設置를 中心으로』, 학연문화사, 1995.
- 김영원, 『조선시대 도자기』, 서울대학교출판부, 2003.
- 방병선, 『조선후기 백자 연구』, 일지사, 2000.
- 방병선, 『순백으로 빚어낸 조선의 마음, 백자』, 돌베개, 2002.
- 방병선, 『왕조실록을 통해 본 조선도자사』, 고려대학교출판부,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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