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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13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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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국문 |
한글표제 | 국문 |
한자표제 | 國門 |
상위어 | 칠사(七祀) |
관련어 | 국려(國厲), 국행(國行), 사명(司命), 조(竈), 중류(中霤), 호(戶) |
분야 | 왕실/왕실의례/예기 |
유형 | 고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박봉주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국문(國門)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고종실록』33년 8월 14일 |
칠사(七祀)의 대상이 되는 일곱 신령 중 도성 문을 지키는 신.
개설
조선시대에 종묘에서 봄, 여름, 가을, 겨울과 납일(臘日)에 행한 종묘 오향제(五享祭)와 함께 거행된 칠사는 인간과 세상에 두루 도움이 되는 요긴한 일들을 보살피고 관리하는 일곱 소신(小神), 즉 사명(司命), 중류(中霤), 국문(國門), 국행(國行), 국려(國厲), 호(戶), 조(竈)에게 올리는 합동 제사를 뜻한다. 이 중 국문은 성문(城門) 출입을 관장하는 신령으로, ‘문(門)’으로도 별칭되었으며, 종묘의 가을 제사와 동지 뒤의 세 번째 미일(未日)인 납일 제사에서 제향되었다.
내용
칠사는 주대(周代)부터 시행되었다. 주대의 제법(祭法)에 따르면, 인간 세상에 거주하면서 인간과 세상에 꼭 필요한 일들을 보살피고 작은 과실을 감찰하는 소신들을 모아서 합동 제사를 지냈는데, 천자는 칠사를, 제후는 오사(五祀)를, 대부(大夫)는 삼사(三祀)를, 사(士)는 이사(二祀)를, 서인(庶人)은 일사(一祀)를 각각 주관하도록 하였다. 천자가 주관하는 칠사는 사람의 생명을 담당하는 별인 문창궁에 지내는 제사인 사명, 거주지를 관할하는 신에게 지내는 제사인 중류, 도성 문을 관장하는 신에게 드리는 제사인 국문, 길을 관장하는 신에게 드리는 제사인 국행, 후손이 없는 옛 제왕의 귀신으로 죽이는 처벌을 담당하는 신에게 드리는 제사인 국려, 문지방으로의 출입을 맡은 신에게 드리는 제사인 호, 음식을 관장하는 신에게 드리는 제사인 조가 있었다. 한편 제후의 오사는 사명, 중류, 국문, 국행, 공려(公厲), 대부의 삼사는 문(門), 행(行), 족려(族厲), 사의 이사는 문, 행이었고, 서인의 일사는 호나 조 중에서 하나를 택하도록 하였다.
조선초기에 국가 제례를 정비하면서 칠사를 종묘의 정기 제례일에 맞춰 함께 제향하도록 정하였다. 조선은 제후국을 자처했기 때문에 고대의 예제를 따르자면 오사를 실행하는 것이 맞지만, 오사 대신 칠사를 실행하도록 하였다. 다만 천자만이 쓸 수 있는 ‘태려’나 ‘국려’라는 용어 대신 ‘공려’라는 호칭을 선택하였다. 이에 따라 종묘의 봄[孟春] 제향 때 사명과 호를, 종묘 여름[孟夏] 제향 때 조를, 종묘 가을[孟秋] 제향 때 국문과 공려를, 종묘 겨울[孟冬] 제향 때 국행을 각각 제사지냈다.
성종대 이전에는 3년마다 한 번씩 종묘의 겨울 제향 후에 대규모의 합동 제사인 협향(祫享)을 별도로 거행하였는데, 협향에서도 일곱 신령이 모두 제향되었다. 협향은 성종대 이후 제후국으로서 격에 맞지 않다고 하여 폐지되었다. 칠사는 세종대부터 길례 소사(小祀)로 분류되었고, 이후 큰 변화 없이 시행되다가, 고종대에 중류만이 새롭게 소사로 분류되고 나머지는 국가 제례에서 제외되었다(『고종실록』33년 8월 14일).
참고문헌
- 『국조오례서례(國朝五禮序例)』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춘관통고(春官通考)』
- 『예기(禮記)』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