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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安順王后) 한씨(韓氏)의 능.

개설

예종은 1469년(예종 1) 11월 28일 경복궁 자미당에서 승하하였다. 능호를 창릉이라고 하고 도성의 서편 고양(高陽)에 자리한 경릉(敬陵)의 북쪽 언덕에 능침을 조성하였으며, 1470년(성종 1) 2월 5일에 장사를 지냈다. 그 뒤 1498년(연산군 4) 12월 23일에 안순왕후 한씨가 승하하자, 예종의 능 동쪽에 동원이강(同原異岡)의 형식으로 능침을 조성하고 1499년 2월 14일에 안장하였다.

서오릉 경역에 처음으로 창릉이 조성된 뒤, 숙종의 원비 인경왕후(仁敬王后)의 익릉(翼陵)이 조성되고 다시 숙종과 인현왕후(仁顯王后), 인원왕후(仁元王后)의 명릉(明陵), 영조의 원비 정성왕후(貞聖王后) 의 홍릉(弘陵) 등이 자리 잡게 되면서 숙종과 영조 연간에 왕의 행차가 잦았다. 왕이 서오릉에 행행할 때는 서오릉에서 가장 위계가 높은 창릉부터 봉심하였다.

조성 경위

1469년에 예종이 승하함에 따라 창릉을 조성하였는데, 봉분 주변에 병풍석을 두르지 않고, 난간석 12칸을 배치하고 동·서·북 삼면을 두르는 곡장(曲墻)을 설치하였다. 봉분의 남쪽에는 혼유석, 장명등 1좌, 망주석 1쌍을 배치하였다. 석상은 문인석 1쌍, 무인석 1쌍, 마석 1쌍, 양석 1쌍, 호석 2쌍을 두었다. 능침 남쪽 약 67보 아래에 정자각을 세우고, 정자각의 남서쪽에 수라간 2칸, 남동쪽에 수복방 2칸을 조성하였다. 망료위와 홍살문 망배위도 건립하였다.

1499년(연산군 5)에 안순왕후의 능침을 조성하면서, 예종릉에 마련되었던 정자각이 왕과 왕후의 능침 사이의 중간지점으로 옮겨 짓게 된다. 이때 하나의 능역 안에 왕과 왕후의 제사를 합하여 모실 때 정자각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다(『연산군일기』 5년 1월 22일). 창릉의 사례는 이미 예종의 신주를 모시고 길례를 지내고 있는 정자각이 있으며, 이후 안순왕후의 상례가 행해졌다. 전례로 제시되는 것은 광릉(光陵)헌릉(獻陵)·영릉(英陵)의 사례였다.

헌릉과 영릉의 사례에서는 모두 왕후가 먼저 상례를 치르고 이후에 왕의 상례가 이루어졌으므로, 뒤에 설행되는 왕에게 맞추어 상례부터 하나의 정자각에서 합설하여 제례를 행했다. 반면 광릉의 경우는 세조의 국상이 후에 이루어졌더라도 가정자각(假丁字閣)을 따로 지어 상례를 마친 후 길례를 지낼 때부터 정자각에서 왕과 왕후의 신주를 모시고 합설한 사례이다. 이 같은 논의를 통해 산릉에서 이루어지는 흉례와 길례의 공간인 정자각과 가정자각의 용례를 결정하고 정형화 할 수 있었다.

정자각의 북동쪽에는 표석(表石)을 세웠는데, 1755년(영조 31)에 이를 보호하기 위해 비각을 한 칸 지었다. 정자각은 1756년(영조 32)에 화재로 소실되었는데(『영조실록』 32년 4월 25일), 그해 5월에 중건도감(重建都監)을 조직하고 당상으로 판서(判書) 이태중(李台重), 참판(參判) 홍익삼(洪益三), 감역으로 참봉 홍계우(洪啓祐)를 임명하여 중건 공사를 진행하였다. 이때 정전은 정면 3칸 배위청 2칸으로 조성하였다.

재실은 원래 홍릉 정자각 아래 오른쪽에 있었다고 하는데, 1757년(영조 33)에 홍릉이 조성되면서 창릉 홍살문 서쪽 180보 위치로 이전되었다. 1765년(영조 41)에 이덕용이 편찬한 『창릉등록(昌陵謄錄)』에는 정자각의 규모에 관한 기록과 재실 간가도(間架圖) 형식의 그림이 수록되어 당시 창릉 내에 조성된 건축 규모를 상세히 알 수 있다.

조성상황

오늘날에는 재실과 수라간, 수복방 등이 모두 소실되고, 정전 3칸 배위청 2칸의 정자각과 1칸의 비각이 자리하고 있다.

참고문헌

  • 『창릉등록(昌陵謄錄)』
  • 『춘관통고(春官通考)』
  •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서울의 능묘』,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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