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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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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준경묘 |
한글표제 | 준경묘 |
한자표제 | 濬慶墓 |
관련어 | 영경묘(永慶墓) |
분야 | 왕실/왕실건축/능·원·묘 |
유형 | 능·원·묘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대한제국기 |
집필자 | 이욱 |
장소 |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 활기리 |
좌향(坐向) | 신좌을향(辛坐乙向)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준경묘(濬慶墓)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고종실록』 36년 5월 25일 |
조선 태조의 5대조인 이양무의 묘.
개설
이양무(李陽茂)는 태조의 5대조이자, 목조 이안사(李安社)의 부친이다. 장군이었다고 하는데, 자세한 내력은 알 수 없다. 목조가 세거지인 전주를 떠나 강원도로 이주할 때 함께 옮겨 가 그곳에서 죽었다고 전해진다.
강원도 삼척에 있는 한 고총이 조선초기부터 이양무의 무덤으로 알려졌지만, 확실한 증거가 없는 까닭에 조정에서는 왕실의 묘로 인정하지 않았다. 1899년(광무 3)에 이르러 비로소 이 고총을 이양무의 묘로 공인하고 묘호를 ‘준경’이라 하였다.
조성 경위
조선초기부터 강원도에는 목조의 부친인 이양무와 그 부인의 묘가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졌다. 그 대표적인 곳이 현재의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에 있는 준경묘와 영경묘이다. 이곳은 조선 건국 초기부터 국가의 보호를 받았는데, 선조대에는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정철(鄭澈)이 이 묘가 목조의 고비(考妣) 즉 부모의 묘라며 수축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묻힌 사람의 신원을 확인할 수 없는 까닭에 조정에서는 이양무의 묘로 공인하지 않고 보호하기만 하였다.
조선중기에는 삼척이 아닌 황지 부근에 이양무의 묘가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조정에서는 그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수차례 답사를 했지만, 묘의 주인을 밝힐 수 없었다. 이후 조선후기에 삼척부사(三陟府使)를 지낸 허목(許穆) 역시 이곳을 이양무의 묘라고 주장하였다. 이처럼 조선후기까지 조정에서 이양무의 묘를 확정하지 못하고 있는 사이, 묘 관리와 제향은 왕실 후손들에 의해 사적으로 이루어졌다.
1880년(고종 17)에는 선예(璿裔) 진사 이종(李宗)이란 사람이 삼척의 두 묘 아래 거주하는 종인(宗人)들과 더불어 60냥의 돈을 출자하고, 매년 10월에 시제(時祭)를 지냈다. 그리고 1890년(고종 27)에는 선예 참봉(參奉)이과영(李果英)이 종친부(宗親府)의 관문(關文)을 받아, 인근에 사는 종인들과 함께 자금을 모아 분묘를 개축하고 소옥(小屋)을 건립하였다.
삼척의 묘가 조정으로부터 왕실 묘로 인정을 받게 된 것은 1899년의 일이다. 전해인 1898년(광무 2)에 의정부(議政府) 찬정(贊政)이종건(李鍾健) 등이 삼척 묘역을 수호할 것을 청하였는데, 그 일이 계기가 되어 조정에서 조사를 한 뒤 이듬해에 비로소 이를 이양무의 묘로 인정하고 묘호를 ‘준경’이라 하였다. 그와 더불어 준경묘 인근에 있던, 이양무의 부인 삼척이씨의 묘는 ‘영경(永慶)’이라 정하였다(『고종실록』 36년 5월 25일). 조정에서는 이때부터 준경묘와 영경묘에 매년 제사를 지냈다.
조성 상황
준경묘 앞에는 표석과 정자각을 세웠는데, 정자각은 지형상 ‘정자(丁字)’가 아니라 일자(一字) 형태로 건립하였다. 표석 뒷면의 음기(陰記)는 고종이 직접 지었다. 재실(齋室)과 전사청(典祀廳)은 준경묘와 영경묘의 가운데 지점에 해당하는 활기리에 세워 공동으로 사용하게 하였다. 준경묘의 제향은 1년에 한 번 청명에 거행하였으며, 헌관(獻官)은 삼척군수(三陟郡守)가 맡았다. 1981년에 강원도 기념물 제43호로 지정되었다.
관련 사항
준경묘의 조성은 목조의 행적과 연관되어 있다. 이성계(李成桂)의 본관은 전주이며, 시조는 신라시대 인물인 사공공(司空公)이한(李翰)이다. 전주이씨는 시조부터 16대손 이양무에 이르기까지 전주를 본거지로 생활했는데, 목조에 이르러 그곳을 떠나 한반도 북쪽으로 이주하였다. 이때 그의 부모인 이양무와 그 부인도 함께 옮겨 갔다. 삼척은 목조가 전주를 떠난 뒤 함흥에 터를 잡기 전에 잠깐 기거한 곳으로 전해진다. 목조가 삼척으로 이주한 것은 이곳이 그의 외향(外鄕)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목조가 기거한 곳의 정확한 위치는 알려지지 않았다. 따라서 준경묘를 조성한 것은 목조의 삼척 이주를 보여 주는 증거이기는 하지만, 구체적인 사실에 바탕을 둔 것이라기보다 그동안의 전승을 수용한 것이었다.
한편, 당시 삼척 미로리와 가까운 활기동에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있었는데, 이를 목조의 유거지로 간주하였다. 그리하여 준경묘를 조성할 때 활기리에 ‘목조대왕구거유지(穆祖大王舊居遺址)’라 쓰인 비석을 세워 목조의 삼척 이주를 기념하였다.
참고문헌
- 『삼척양묘지(三陟兩墓誌)』
- 『조경단준경묘영경묘영건청의궤(肇慶壇濬慶墓永慶墓營建廳儀軌)』
- 『조야기문(朝野記聞)』
- 『준경전도(濬慶全圖)』
- 『척주지(陟州志)』
- 이욱, 「조선시대 왕실 원조의 무덤 찾기-준경묘와 영경묘를 중심으로-」, 『종교연구』60,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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