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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10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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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장릉 |
한글표제 | 장릉 |
한자표제 | 長陵 |
상위어 | 능원(陵園) |
분야 | 왕실/왕실건축/능·원·묘 |
유형 | 능·원·묘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정춘환 |
장소 |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운천리 능말마을) |
좌향(坐向) | 묘좌유향(卯坐酉向)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장릉(長陵)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영조실록』 7년 8월 30일, 『효종실록』 즉위년 5월 18일, 『효종실록』 즉위년 9월 20일, 『영조실록』 7년 5월 28일, 『영조실록』 8년 3월 3일, 『영조실록』 25년 2월 10일 |
조선 인조와 원비(元妃) 인렬왕후한씨의 능.
개설
1635년(인조 13)에 인열왕후(仁烈王后) 한씨(韓氏)가 승하함에 따라 이듬해 파주 운천리에 처음 조성되었고, 1649년(인조 27)에 인조가 승하하자 함께 안장되었다. 그러나 장릉의 터가 좋지 않다는 상소가 끊임없이 이어졌고, 그에 따라 천장 논의가 계속되었다. 그러던 중 1731년(영조 7) 3월에 장릉에 벌레와 뱀[蟲蛇]이 나타난 일을 계기로 마침내 1731년 3월 19일 능을 옮겨 모실 계획을 정하였고 그해 8월 30일에 오늘날의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갈현리로 옮겼다.
조성 경위
인조는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을 통해 왕위에 올랐다. 인열왕후는 서평부원군한준겸(韓浚謙)의 딸이다. 1610년(광해군 2)에 당시 능양군(綾陽君)이던 인조와 혼인하여 청성현부인(淸城縣夫人)으로 봉해졌으며, 인조가 즉위하면서 왕비가 되었다. 제17대 왕인 효종과 소현세자(昭顯世子)·인평대군(麟坪大君)·용성대군(龍城大君)을 낳았으며, 1635년(인조 13) 12월 9일 병이 위독해져 승하하였다.
인조는 장릉을 조성하면서 자신의 능침 자리도 함께 계획해 두었는데, 1649년(인조 27)에 향년 55세로 승하하여 인열왕후 곁에 묻혔다. 그러나 장릉의 터가 좋지 않다는 상소가 오랫동안 계속되었는데, 결국 1731년 8월에 천장하여 오늘에 이른다(『영조실록』 7년 8월 30일).
조성 상황
장릉은 처음 조성될 당시에는 파주 소재지로부터 북쪽 20리 거리에 있었다[『인조실록』 인조대왕 묘지문]. 1636년(인조 14) 2월 13일에 총호사(總護使)홍서봉(洪瑞鳳) 등이 파주의 산릉에 가서 묘좌유향(卯坐酉向)으로 혈을 정했다.
1649년 5월 8일, 인조가 창덕궁 대조전 동침에서 승하하자, 생전의 뜻대로 장지는 인열왕후의 능이 있는 장릉으로 정하였다. 그런데 미처 장례를 치르기도 전에 장릉의 자리가 좋지 않다는 상소가 올라왔다(『효종실록』 즉위년 5월 18일). 하지만 장릉은 인조가 생전에 미리 정해 둔 장지였기 때문에 쉽게 바꿀 수 없었다.
1649년(효종 즉위) 7월부터 가정자각(假丁字閣)을 짓기 시작해, 그해 9월 20일에 묘좌유향의 언덕에 장사를 지냈다(『효종실록』 즉위년 9월 20일). 인조는 인열왕후의 국장 때 자신의 사후 능침 자리를 고려하여, 곡장(曲墻)이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하고 정자각도 중앙에 짓게 하였다. 이는 또한 능역을 새로 조성하느라 백성을 거듭 번거롭게 하는 일을 방지하려는 의도에 따른 것이기도 했다.
한편 장릉이 길하지 않다는 주장과 천장에 관한 논의는 인조의 생전에도 있었는데, 이는 인조의 국장을 치른 뒤에도 여전하였다. 1687년(숙종 13) 10월에는 능원대군(綾原大君) 이보(李俌)의 아들 영풍군(靈豊君) 이식(李湜)이 상소를 올려, 장릉 풍수의 흠을 말하고 길한 자리를 다시 정하도록 청했다. 이듬해 9월 13일에 다시 장릉의 풍수에 결점이 있다는 상소가 올라오자, 결국 천장을 주장하는 자들을 모두 벌하였다.
그에 따라 장릉의 천장 문제는 마무리되는 듯했으나, 40여 년 뒤인 1731년에 다시 논의가 진행되었다. 장릉의 능침 사이에 뱀이 출몰한다는 소식과 더불어, 세간에서는 능을 처음 개광할 때 뱀이 출몰했으나 당시 총호사였던 김자점(金自點)이 이를 숨기고 그대로 능을 봉했다는 이야기까지 나돌아 그해 3월 16일에 천릉 문제를 논의하게 된 것이다. 그 뒤 실제로 신하들이 장릉을 시찰했을 때도 뱀이 출몰하고, 석물이 갈라지는 변고를 보게 됨에 따라 결국 천장하기로 결정하였다. 5월 28일에는 총호사홍치중(洪致中) 등이 새 능지를 살피고 돌아와, 능지 주변의 형세와 혈(穴) 자리가 매우 좋다고 아뢰었다(『영조실록』 7년 5월 28일).
새 장릉은 합장릉의 제도를 따랐는데, 치수가 맞지 않는 병풍석·난간석·혼유석·장명등 등만 새로 만들고 나머지 석물은 옛 능에서 옮겨 와 그대로 사용하였다. 원경 및 석물의 배설은 영릉(英陵)을 따르고, 방위는 이전과 같게 하였다. 그리고 그해 8월 30일에 마침내 천장을 거행하였다.
변천
장릉이 천장되기 전에는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사가 능의 흙을 파헤치는 일이 있었다. 그 뒤 큰비에 곡장이 무너지기도 하고, 1730년(영조 6)에는 능 위에 불이 나기도 했다. 천장 이후에는 석물이 손상되는 일이 일어나기도 했지만(『영조실록』 8년 3월 3일), 큰 변고는 없었다. 그러다가 1838년(헌종 4) 12월에는 재실이 불에 타는 사건이 일어났고, 1914년 11월에는 홍살문이 바람에 전복되어 개건하였다. 1974년과 1985년에 각각 재실을 보수하였으며, 1999년에는 능역의 병풍석과 재실 일곽을 보수하였다.
관련 사항
1749년(영조 25)에 영조는 장릉의 동북쪽 기슭을 자신의 산릉 터로 정하였다(『영조실록』 25년 2월 10일). 1731년에 장릉을 천장할 때 이미 내맥에 ‘왕(王)’ 자의 형상이 있는 곳으로 지금까지 왕을 장사하지 않은 것이 이상할 만큼 좋은 자리임을 확인한 바 있었다. 이처럼 영조는 장릉 경내에 묻히길 원했으나, 실제로는 동구릉 내에 안장되었다.
장릉을 천장한 기록은 1789년(정조 13)에 정조가 사도세자의 능인 융릉(隆陵)을 경기도 양주에서 수원 화성으로 이장할 때 참고가 되었다.
참고문헌
- 『산릉도감의궤(山陵都監儀軌)』
- 『인조대왕산릉의궤(仁祖大王山陵儀軌)』
- 『인조대왕천릉등록(仁祖大王遷陵謄錄)』
- 『장릉도이(長陵圖而)』
- 『장릉선생안(長陵先生案)』
- 『장릉제기년한책(長陵祭器年限冊)』
- 『장릉지(長陵誌)』
- 『장릉직원이동부(長陵職員移動簿)』
- 『장릉천봉등록(長陵遷奉謄錄)』
- 『장릉천봉시분원일기(長陵遷奉時分院日記)』
- 『장릉천봉시산능도감의궤(長陵遷奉時山陵都監儀軌)』
- 『장릉천봉의주등록(長陵遷奉儀註謄錄)』
- 『천릉도감부청의궤(遷陵都監部廳儀軌)』
- 『천봉도감등록(遷奉都監謄錄)』
- 『천장등록(遷葬謄錄)』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