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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10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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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연산군묘 |
한글표제 | 연산군묘 |
한자표제 | 燕山君墓 |
상위어 | 연산군(燕山君) |
동의어 | 연산군분묘(燕山君墳墓), 연산묘(燕山墓) |
관련어 | 거창군부인(居昌郡夫人) 신씨(愼氏), 임영대군(臨瀛大君) |
분야 | 왕실/왕실건축/능·원·묘 |
유형 | 능·원·묘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이혜원 |
장소 | 강화도 교동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연산군묘(燕山君墓)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중종실록』 1년 11월 8일, 『중종실록』 1년 12월 12일, 『중종실록』 7년 11월 22일, 『중종실록』 7년 11월 24일, 『중종실록』 7년 12월 12일, 『중종실록』 7년 12월 15일, 『중종실록』 7년 12월 22일, 『중종실록』 8년 2월 11일, 『중종실록』 32년 4월 8일, 『영조실록』 23년 12월 21일, 『영조실록』 39년 4월 19일, 『순종실록』 1년 7월 23일 |
폐위된 조선 제10대 왕 연산군과 그 부인 신씨(愼氏)의 무덤.
개설
연산군은 1506년(중종 1)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폐위된 뒤, 그해 11월에 유배지인 강화도 교동에서 역질로 세상을 떠났다. 이에 중종은 예관(禮官)을 보내 강화도감사·도사(都事)와 더불어 왕자군의 예로 장사하게 하고(『중종실록』 1년 11월 8일), 강화의 관원이 명절마다 제사를 지내고 묘를 돌보도록 하였다(『중종실록』 1년 12월 12일). 그 뒤 1513년(중종 8)에 지금의 위치인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으로 천장(遷葬)하였다. 1537년(중종 32)에 그 부인 신씨가 죽자, 연산군 옆에 안장하였다. 1991년에 사적 제362호로 지정되었다.
조성 경위
1512년(중종 7)에 조정에서는, 단종의 모후이자 문종의 비인 현덕왕후(顯德王后)를 복위하는 문제가 논의되었다(『중종실록』 7년 11월 22일)(『중종실록』 7년 11월 24일). 그와 함께 연산군묘가 이름조차 없이 방치되고 있다는 사실이 거론되었다. 이에 연산군의 부인 신씨가 왕에게 글을 올려, 연산군을 강화도에서 양주 해촌(海村)으로 이장하기를 청하였다. 중종은 왕자군의 예로 개장(改葬)하도록 하였으며, 장례에 필요한 물품과 관을 내려 주도록 하였다(『중종실록』 7년 12월 12일)(『중종실록』 7년 12월 15일)(『중종실록』 7년 12월 22일). 이듬해인 1513년(중종 8)에는 연산군의 묘를 수축하도록 명을 내렸다(『중종실록』 8년 2월 11일).
연산군의 부인 신씨는 연산군과 함께 폐위된 뒤 폐서인으로 정청궁(貞淸宮)에 거처하다가, 1537년(중종 32)에 죽어 연산군 옆에 묻혔다. 제사는 외손인 구엄(具渰)이 받들었으나, 그가 죽은 뒤에는 후사가 없어 외손인 이안눌(李安訥)이 이어받았다.
조성 상황
연산군의 묘는 왕자군의 예로 조성하고, 양주군의 관원으로 하여금 제사를 관리하도록 하였다. 연산군은 왕이었으나 군으로 강등되어 폐위되었으므로 그 무덤을 ‘능’이 아니라 ‘묘’라고 부른다.
묘의 구성은 왕릉보다는 못하지만, 일반 사대부의 묘보다는 격식을 갖추었다. 연산군이 동쪽, 부인 신씨가 서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ㄷ’ 자 모양의 곡장으로 둘러싸여 있다. 봉분 앞에는 각각 묘표, 상석, 장명등이 있고, 망주석이 1쌍 놓였다. 하계의 중앙에는 향로석이 하나 배치되었으며, 문석인(文石人)이 2쌍이 설치되었다. 조선시대 전기 쌍분의 전형적인 형식이다. 연산군 묘표의 뒷면에는 ‘정덕팔년이월이십일장(正德八年二月二十日葬)’이라고 새겨져 있어, 1513년(중종 8)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부인 신씨는 1537년 4월에 죽었으며, 묘표에는 ‘가정십육년유월이십육일장(嘉靖十六年六月二十六日葬)’이라고 새겨져 있다. 신씨의 경우 폐주의 부인이므로 왕후(王后)의 부모와 같은 예로 장사하였다(『중종실록』 32년 4월 8일).
변천
1524년(중종 19)에 연산군의 사위 구문경(具文璟)과 딸 휘신공주(徽愼公主)의 무덤이 연산군묘 아래쪽에 조성되었다. 연산군의 제사를 모시게 된 외손 구엄이 부모의 묘를 이곳에 둔 것이다.
연산군은 비록 폐위된 왕이었으나, 후대 왕들은 지속적으로 그 묘를 관리하였다. 영조대에는 무너진 봉분을 보수하였으며(『영조실록』 23년 12월 21일)(『영조실록』 39년 4월 19일), 정조와 철종 연간에도 묘를 살피거나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1908년(융희 2)에는 제사 제도를 개정하여, 연산군묘와 광해군묘에는 다른 능·원·묘와 같이 일 년에 한 번 제사하도록 하였다(『순종실록』 1년 7월 23일).
관련 사항
아래쪽에는 태종의 후궁인 의정궁주(義貞宮主) 조씨(趙氏)의 묘가 있다. 원래 이곳은 세종의 4남 임영대군(臨瀛大君)이 왕에게 하사받은 사패지였는데, 1454년(단종 2) 후사가 없던 의정궁주의 제사를 임영대군이 모시게 되면서 묘를 이곳에 조성하였다. 그 후 임영대군의 외손녀였던 거창군부인(居昌郡夫人)신씨의 청으로 연산군의 묘를 이곳으로 이장한 것이다.
참고문헌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경기도박물관, 『경기묘제석조미술』, 경기도박물관, 2007.
-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서울의 능묘』,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