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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02 기준 최신판



조선시대에 왕의 초상을 그리기 위해 설치한 기구.

개설

조선시대에는 왕의 초상을 어진(御眞) 또는 어용(御容)이라고 했다. 도사(圖寫)란 기왕의 영정을 원본으로 하여 그리는 것이 아니라 국왕의 모습을 보고 그린다는 뜻을 담은 용어이다. 조선시대에 왕의 초상화를 그린 경우는 매우 많은데, 대부분은 중관(中官)이나 왕자·대군 등에게 시켜 사적으로 그리게 했다. 이러한 방식 대신 조정에 왕의 초상을 그리는 임시 기구를 설립하고, 전 과정을 공식적으로 관리한 경우도 있는데 이때 설치한 임시 기구를 어용도사도감(御容圖寫都監) 또는 어진도사도감(御眞圖寫都監)이라고 불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어진을 그리기 위해 도감을 설치한 것은 1713년(숙종 39)이 처음이다. 숙종은 이에 앞선 1695년에 조정에 알리지 않고 화원 조세걸(曺世傑)에게 초상화를 그리게 한 후 이를 강화도에 옮겨 보관하게 했다. 강화부에서는 영전(影殿)을 건립한 후 어진을 봉안하고, 정기적인 봉심을 통해 초상화를 관리했는데, 이 초상이 숙종과 거의 닮지 않았다는 의견이 제기되었다(『숙종실록』 39년 3월 30일). 진면목을 담아내지 못한 구초상 대신에 새로 초상을 그려 봉안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숙종은 새 어진의 초본을 그린 후 대신들에게 보여 전신이 제대로 되었는지 확인하게 했다(『숙종실록』 39년 4월 8일). 이것이 기준에 미치지 못하자 더 좋은 화본을 얻기 위해 화원과 대신들이 임금의 얼굴을 자세히 보고, 그 후에 다시 초본을 그리고 검토·수정하는 절차를 걸친 후 정본으로 정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또 이 일의 중요성을 따져볼 때 도감을 설치하여 관리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와 처음으로 도감을 설치하게 되었다. 이조에서 정한 도감의 명칭은 처음에는 어용모사도감(御容模寫都監)이었다. 구본을 모사하는 것과 달리 왕을 직접 보고 그리는 것이므로 모사 대신 도사라는 용어를 쓰도록 하여 어용도사도감이라는 명칭이 확정되었다.

조직 및 역할

어진도사도감에서는 어진을 그릴 화사의 선발, 초본의 작성, 정본의 선택 등 초상화를 그리는 전 과정을 관리하였다. 또한 완성된 어진을 조정 신하들에게 공개하고, 이를 어진 봉안각에 봉안하는 일까지 제반 사무를 관장하고, 구체적인 의주를 마련했다. 대부분의 사무는 도감에서 직접 담당했다. 어진 도사와 봉안 과정에 필요한 의장의 제작은 도감 1방에서 담당했고, 별공작(別工作)에서는 어진을 그릴 때 사용할 붓·먹·벼루 등과 공장들이 사용할 도구의 조달을 담당했다.

현왕의 초상을 그리는 일을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거행하면서 도감을 설치한 것은 전례가 없었다. 백관이 어진을 봉심하는 의식이나, 도성 밖의 영전에 봉안하는 의식의 구체적인 절차 등을 모두 새롭게 의논하여 마련했다.

변천

숙종 이후 영조, 정조, 순조, 헌종, 철종, 고종, 순종 등 18~19세기의 왕들은 모두 생전에 초상을 그려 여러 본의 어진을 남겼다. 영조의 경우 총 13본에 이르는 어진을 남겼지만 이 일을 위해 도감을 설치하여 일을 크게 벌이지 않았다. 오직 숙종이 어진을 그렸던 해와 같은 갑년이 되었던 1773년에 80세 초상화를 그리면서 어진도사도감을 설치했다. 정조는 어진을 그리고 봉심하고 봉안하는 일을 규장각에서 담당하게 했다. 대한제국 선포 이후 1901년 고종의 어진과 순종의 예진(睿眞)을 그린 후 평양에 봉안하였는데, 이 과정을 주관하기 위해 도감을 설치하였다. 이 일을 기록한 『어진도사도감의궤』가 전한다.

참고문헌

  • 『(숙종)어용도사도감의궤((肅宗)御容圖寫都監儀軌)』
  • 『(고종)어진도사도감의궤((高宗)御眞圖寫都監儀軌)』
  • 김지영, 「숙종·영조 대 어진도사와 봉안처소 확대에 대한 고찰」, 『규장각』 27, 2004.
  • 윤진영, 「장서각 소장 『어진도사사실』의 정조~철종 대 어진도사」, 『장서각』 11,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