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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1:55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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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와서 |
한글표제 | 와서 |
한자표제 | 瓦署 |
상위어 | 공조(工曹), 속아문(屬衙門) |
하위어 | 별와서(別瓦署), 별와요(別瓦窯), 별요(別窯), 제조(提調), 별제(別提) |
동의어 | 와요(瓦窯), 동서와요(東西瓦窯) |
관련어 | 번와소(燔瓦所), 개와장(蓋瓦匠), 와장(瓦匠), 적눌장(積訥匠) |
분야 | 정치/행정/관청 |
유형 | 집단·기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장경희 |
폐지 시기 | 1882년(고종 19)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와서(瓦署) |
궁궐의 전각 지붕을 덮는 기와를 굽던 관립(官立) 기와 공장을 관장하던 관청.
개설
조선초기에는 기와를 굽는 곳으로 동·서 와요(瓦窯)를 두었으나 성종 초에 『경국대전』 체제로 직제를 개편하면서 와서(瓦署)로 개편하였다. 이후 임진왜란이 끝난 후 궁궐을 재건하면서 기와의 수요가 증가하여 와서를 공조(工曹) 산하에 두었다. 조선후기 내내 왕이나 왕비의 국장 때 설치되었던 산릉도감의 분소(分所)로 번와소(燔瓦所)가 설치되면 와서의 별제(別提)가 파견되어 개와장(蓋瓦匠)이나 와장(瓦匠), 적눌장(積訥匠) 등을 감독하였다. 19세기에 들어 창덕궁 내 전각을 개건하거나 경복궁을 영건할 때 와서의 활동이 활발하였다. 1882년(고종 19)에 폐지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조선을 건국한 초기에는 송도에서 한양으로 천도한 이후 도성을 건설하기 위해 궁궐 전각 위 지붕을 덮는 기와를 구울 필요가 있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동·서 지역에 각각 동요(東窯)와 서요(西窯)를 두었다. 1414년(태종 15)에는 동·서요(東·西窯)가 처음으로 나타나는데 1460년(세조 6) 이후로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경국대전』 체제로 관서와 직제가 개편되면서 1469년(성종 1)부터는 와요가 와서로 개칭되었고 궁궐의 전각을 비롯한 관에서 공급하는 기와를 계속 관장하였다. 한편 백성들이 사용할 기와를 공급하기 위해 별와서(別瓦署)가 따로 설치하였다. 이 별와서는 별와요(別瓦窯), 별요(別窯)라고도 불렸다.
조직 및 역할
와서의 명목상 책임자는 도제조와 제조, 부제조이다. 도제조는 1품관 재상이었고 부제조는 의례적으로 승지가 임명되었으나, 1480년 폐지되었다. 와서의 실제 운영자는 종6품의 별제, 별좌, 판관 등이었다. 직제상 정원은 별제 20명, 이속(吏屬)으로는 서리(胥吏) 2명, 고직(庫直) 2명, 사령(使令) 2명을 두었다.
한편 별와서의 명목상 책임자는 제조와 부제조이고, 기와를 굽는 승려인 와장승(瓦匠僧)을 소속시켰다. 별와서의 와장들은 각 도에서 징발된 승장으로서, 충청도와 강원도에서 각각 승려 50명과 와장 6명, 경상도에서 승려 80명과 와장 10명, 경기도와 황해도에서 각각 승려 30명과 와장 5명, 전라도에서 승려 30명과 와장 8명을 동원하였다. 세종대 이후 별와서의 명목상 책임자는 제조였고 실질적 책임자는 감역관이었다. 와장으로는 승려 40명을 차출하였으며, 와장을 보조할 일꾼들에게는 의복과 식량을 지급하였다. 급료는 보조자들에게는 기와로 지급하였고, 승려들에게는 후일 근무 성적에 따라 관직으로 보상하였다.
변천
조선초기에 설치된 동서요는 1469년 와서로 불리면서 한성부의 별사(別司)로 운영되었다. 이후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1594년(선조 28)에는 공조에 소속되었으며, 와서 소속의 와장들은 사간원으로 옮겨 갔다.
조선후기 왕이나 왕비의 국상 때 왕릉을 조성하기 위해 설치하였던 산릉도감에서는 정자각을 비롯한 건물에 필요한 기와를 제작하기 위해 와서의 분소였던 번와소를 설치하였다. 이 번와소에는 와서의 별제를 분차관으로 파견하였으며, 개와장이나 와장, 적눌장 등의 장인을 소속시켜 왕릉의 정자각·수복청·전사청·재실 등의 건물에 얹을 기와를 제작하였다.
1744년(영조 20)에는 강화도의 토성(土城)을 증축할 때 중국에서 벽돌 굽는 방법을 배워 증축하였다. 공력은 줄고 효율이 높아 와서가 가서 배워 오도록 하였다. 이후 벽돌이나 기와의 사적인 생산이 늘면서 와서의 기능이 축소되고 관원이나 장인이 소속되지 않았다. 그 결과 1785년(정조 9) 『대전통편』을 편찬하면서 와서는 관청에서 제외되었다. 그러나 19세기 들어 순조대에 창덕궁 등의 궁궐을 재건하고, 고종 초에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기와의 수요가 많아졌다. 때문에 와서는 계속 존속되었고 1882에 이르러 폐지되었다. 하지만 와서가 폐지된 이후에도 1890년 신정왕후의 국상 때 수릉을 조성하면서 와서 소속이었던 적눌장을 동원하는 등 한말까지 와서 소속 장인의 활동은 계속 이어졌다.
조선초기인 1405년에는 동서요와 별도로 별와요 또는 별요를 두어 백성들이 사용할 기와를 공급하였다. 그러나 설치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기와 굽는 땔나무의 공급과 백성들을 부역시키는 폐단으로 말미암아 1408년부터 폐지가 논의되었다. 마침내 1413년, 생긴 지 8년 만에 폐지되었다. 이후 10여 년이 지난 1423(세종 6) 승려 해선의 건의로 다시 별와요를 설치하였다.
이러한 별와요는 필요에 따라 증설되기도 하였다. 1425년에는 도성 내 대화재로 인해 많은 가옥이 불탔고, 가난하여 스스로 기와를 마련할 수 없는 사람이 많아 이들을 위해 별와요가 설치되었다. 별와요는 필요에 따라 증설되어 1430년 경기도에 3개의 별와요를 더 증설하기도 하였다. 별와요 또한 직제를 개편하면서 1469년(예종 1)에 별와서로 개칭되었다.
1447년에는 별와서를 혁파하자는 논의가 있었으나 생산량을 줄이는 것으로 하고 유지하였다. 1475년에는 별와서의 기와가 평민에게 돌아가지 않으므로 혁파하자는 주장이 있었다. 그러나 불법적으로 평민에게 지급하지 않는 것을 법대로 집행하기 위해 도승지가 제조를 겸하게 하였다. 이후 중종 연간에도 별와서의 혁파가 논의되었으나 여전히 폐지되지는 않았다. 그러다 1580년에 이르러 별와서는 혁파되었다. 이후 민간의 기와 공급은 사요(私窯)에서 담당하게 되었다.
조선후기에 이르면 별와서가 임시 관청의 성격으로 다시 설치되기도 했다. 궁궐을 영건하거나 국장 등 왕실의 오례 때 국력을 총집결하기 위해 설치하는 도감에는 별와서가 함께 설치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별와서는 조선후기에 들어와 임시 가마를 설치하여 짧은 기간에 많은 양의 기와를 공급하는 와서의 분서로 성격이 변하였다.
와서가 처음 생겼을 때의 위치는 알 수 없으나, 연산군 때에 지금의 용산 근처인 둔지방(屯芝坊)으로 옮겨 왔다. 당시 와서를 옮긴 이유는 기와의 운송을 쉽게 하기 위해서였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통편(大典通編)』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만기요람(萬機要覽)』
- 김왕직·최숙경, 『번와장』, 민속원, 2010.
- 서울대학교 규장각, 『규장각 소장 의궤 해제집』2, 서울대학교 규장각, 2004.
- 오희복, 『봉건관료기구 및 벼슬이름 편람』, 여강출판사, 1992.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국학진흥연구사업추진위원회 편, 『장서각 소장 의궤 해제』,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002.
- 장경희, 「조선후기 산릉도감의 장인 연구: 왕릉 정자각과 석의물의 제작과정을 중심으로」, 『역사민속학』25, 2007.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