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와요(別瓦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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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전기에 기와를 구워 민간에 판매하기 위해 설치한 관서.

개설

별와요는 조선전기에 도성 내 민가를 기와집으로 개량하기 위해 설치한 관서이다. 1406년(태종 6) 승려 해선(海宣)의 건의에 따라 설치한 것으로, 기와를 구워 민간에 판매하였다. 별와요는 1409년 혁파되기는 하였으나 이후에도 수요가 있을 경우에 다시 설치되었다가 혁파되었다. 성종 연간 이후에는 별와서(別瓦署)라는 명칭으로 설치되기도 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1406년 1월 28일 승려 해선의 건의에 의해 설치된 관서이다. 해선은 새로운 도읍지인 서울의 민가에 모두 띠[茅]로 집을 덮으면 중국 사신이 왕래하면서 볼 때 아름답지 못하고 또 화재의 위험성이 크다고 하였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별도로 가마를 설치하고 기와를 구워 민간에 판 뒤 이를 가지고 집을 짓게 한다면 10년 안에 도성 안의 건물은 모두 기와집이 될 것이라고 건의하였다. 이 같은 해선의 건의가 받아들여져 바로 별와요가 설치되었다(『태종실록』 6년 1월 28일).

조직 및 역할

별와요는 제조(提調)부제조(副提調)를 두었는데, 설치 초기 제조는 참지의정부사이응(李膺)이, 부제조에는 전 전서(典書)이사영(李士穎)과 김광보(金光寶)가 제수되었다. 또한 화주(化主)로 별와요의 설치를 건의한 승려 해선을 임명하였다.

별와요는 설치 이후 각 도에서 승려와 장인을 징발해 역(役)에 충당하였다. 충청도·강원도에서는 승려 50명과 와장(瓦匠) 6명을, 경상도에서는 승려 80명과 와장 10명을, 경기도·풍해도에서는 승려 30명과 와장 5명을, 전라도에서는 승려 30명과 와장 8명을 차출하였다. 이들을 통해서 기와를 구워 민간에 판매하였다.

변천

별와요는 1409년에 혁파되었다(『태종실록』 9년 7월 12일). 혁파 당시 민간에서 기와 가격으로 이미 쌀 백여 석을 지급하였으나 기와를 받지 못한 사람이 있어 혁파를 미루자고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별와요는 혁파된 뒤에도 기와에 대한 수요가 있을 경우 다시 설치된 듯하다. 1414년에 다시 혁파를 명령한 기록이 확인되며(『태종실록』 14년 4월 7일), 성종 연간에도 화재 예방을 위해 도성 안의 민가를 기와집으로 교체하려고 별와서 또는 별와요라는 이름의 관서를 설치하였다(『성종실록』 7년 8월 9일). 다만 성종 연간에 설치된 별와요가 언제 다시 혁파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별와서 혹은 별와요는 이후에도 일시적으로 설치된 듯한데, 중종 연간에 다시 혁파와 설치를 논의하는 것이 이를 반영한다(『중종실록』 6년 5월 4일) [ 『중종실록』 15년 8월 21일 2번째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