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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1:53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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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사마소 |
한글표제 | 사마소 |
한자표제 | 司馬所 |
관련어 | 사마안(司馬案), 사마재(司馬齋),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 연계안(蓮桂案), 유향소(留鄕所) |
분야 | 사회/향촌/지방자치 |
유형 | 집단·기구 |
시대 | 조선 |
왕대 | 조선 |
집필자 | 이해준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사마소(司馬所)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연산군일기』 4년 8월 10일, 『명종실록』 15년 2월 7일, 『인조실록』 4년 8월 4일 |
조선중기 지방 출신의 생원·진사들이 각 고을에 설립한 자체 협의 기구.
개설
사마소(司馬所)는 조선전기 훈구파(勳舊派)의 유향소(留鄕所)에 대응하여 사마시(司馬試) 출신의 생원(生員)·진사(進士)들이 각 고을에 설립한 자체 협의 기구로 사림파의 향론 주도와 향권 운영에 그 목적이 있었다. 사마소는 설립 초기 생원·진사들의 친목과 학문·정치 토론 및 교육 활동 등으로 향촌의 교화와 지방 행정에 기여하였으나, 사마소 소속 생원·진사들이 점차 향촌 지배 세력으로 발전하여 수령의 지방 통치에 간섭하기도 하였다. 1603년(선조 36) 유성룡(柳成龍)의 건의로 혁파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사마소는 조선전기 훈구파의 유향소 장악에 대한 반발로 사마시 출신의 생원·진사들이 각 고을에 설립한 자체 협의 기구이다. 사마시 출신의 생원·진사들은 향론을 주도하고 향권을 운영하기 위해 사마소를 설립하였다. 훈구파들은 김종직(金宗直) 등 사림파의 이러한 사마소 활동에 대하여 비판과 견제를 하였다. 1498년(연산군 4) 유자광(柳子光)은 남원과 함양 사마소의 사례를 들어 문제점을 지적하고 사마소의 혁파를 청하기도 하였다(『연산군일기』 4년 8월 10일).
사마소는 설립 초기 생원·진사들의 친목과 학문·정치 토론, 교육 활동 등으로 향촌의 교화와 지방 행정에 기여하였으나, 사마소 소속 생원·진사들이 점차 향촌 지배 세력으로 발전하여 유향소를 유명무실하게 만들고 수령의 지방 통치에 간섭하기도 하였다. 사마소는 향교 근처에 있었으며 사마재(司馬齋)라는 별도의 건물이 있는 향교가 많다. 연방안(蓮榜案) 혹은 연계안(蓮桂案)으로 불리는, 생원·진사 시험인 사마시(司馬試) 출신자 명단을 만들고 수령이나 향리들이 그 세력을 억제하지 못하게 하였으며 사마시 출신자에게는 경제적 지원을 제공하였다.
조직 및 역할
사마소의 세력이 점차 강성해지면서 사마소에서는 노비와 토지를 확보하여 재산을 증식하고 향리나 백성들을 함부로 잡아다 형벌을 주는 등의 폐단을 야기하였다(『명종실록』 15년 2월 7일). 이에 1573년(선조 6년)에는 사마소를 혁파하려 했으나 혁파하지 못하였다.
변천
1603년 유성룡의 건의로 사마소가 혁파되었으나 실제로는 지방에 따라 인조 때까지 그 유습이 지속되었다. 1626년(인조 4)에 군정변통사목(軍政變通事目)을 마련할 때에도 향교와 서원·향소와 함께 사마소 문제가 거론되고 어사(御史)로 하여금 사마소를 엄하게 신칙해서 혁파하여 후일의 폐단을 영원히 막을 것을 제안하고 있기 때문이다(『인조실록』 4년 8월 4일).
참고문헌
- 김용덕, 『향청(鄕廳) 연구』, 한국연구원, 1978.
- 김준형, 「조선 후기 진주 지역 사마소의 연혁과 성격」, 『남명학연구』22, 2006.
- 윤희면, 「19세기 말 전라도 남원의 사마소 향전(鄕戰)」, 『조선시대사학보』39, 2006.
- 윤희면, 「경주 사마소에 대한 일고찰」, 『역사교육』37·38, 1985.
- 이태진, 「사림파의 유향소 복립 운동(上): 조선 초기 성리학 정착의 사회적 배경」, 『진단학보』34, 1972.
- 이태진, 「사림파의 유향소 복립 운동(下): 조선 초기 성리학 정착의 사회적 배경」, 『진단학보』35, 1973.
- 정진영, 「조선 전기 안동부 재지 사족의 향촌 지배」, 『대구사학』27, 1985.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