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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1:52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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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예빈시 |
한글표제 | 예빈시 |
한자표제 | 禮賓寺 |
하위어 | 분예빈시(分禮賓寺) |
분야 | 정치/행정/관청 |
유형 | 집단·기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고려후기~조선 |
왕대 | 고려후기~조선 |
집필자 | 이근호 |
폐지 시기 | 1894년(고종 31)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예빈시(禮賓寺)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태종실록』 14년 1월 10일 |
고려 후기와 조선시대에 사신의 접대와 종재(宗宰)에게 공급하는 식사 등의 일을 관장하던 관서.
개설
예빈시는 고려 후기 이후 설치된 관서로 조선시대까지 존속하였다. 예빈시는 사신의 접대를 주 업무로 하면서 동시에 고위 관원들의 식사 및 제향 때 이를 집행하는 집사들의 식사를 제공하는 역할을 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예빈시는 고려 후기 충렬왕 때 설치된 관서로, 이전의 예빈성·객성·전객시 등을 계승하였다. 예빈시는 설치 이후 전객시로, 전객시가 다시 예빈시로 개칭되면서 설치와 폐지가 반복되었다. 조선 건국 직후인 1392년(태조 1) 7월 고려의 관제를 계승하여 예빈시를 설치, 사신의 접대와 국가에서 개최한 연향(燕享)을 관장하도록 하였다. 1403년(태종 3) 의순고를 병합하였다. 한편 조선 건국 초 대신에게 식사를 제공하는 대신선반소를 예빈시 내에 두기도 하였다. 예빈시는 예조의 속아문이었다.
조직 및 담당 직무
고려 후기 예빈시의 직제는 윤·소윤 등이었다가 이후 관제 개편 과정에서 경·소경 혹은 영·부령 등으로 바뀌었다. 조선 건국 직후인 1392년 정3품 판사 2명, 종3품 경 2명, 종4품 소경 2명, 종5품 승 1명과 겸승 1명, 종6품 주부 2명과 겸주부 1명, 종7품 직장 2명, 정8품 녹사 2명을 두었다. 1403년 판사와 경을 각 1명씩 줄였고, 1406년에는 경·소경을 영·부령으로 개칭하였으며, 1414년(태종 14) 영·부령을 다시 윤·소윤으로 바꾸었다.
이후 제조를 두었다가 1423년(세종 5)에 그 정원을 5명에서 3명으로 줄였고, 1437년(세종 19)에는 의정부의 우참찬이 제조를 겸하도록 하였다. 1460년(세조 6)에는 녹사와 부녹사를 각 1명씩 줄였고, 1466년(세조 12)에는 판사·윤·소윤·녹사를 정·부정·첨정·봉사로 개칭하였고, 주부와 직장을 각 1명씩 줄이면서 참봉을 신설하였다.
이후 『경국대전』에 규정된 직제는, 제조 1명과 정4품 제검, 정5품 별좌, 정6품 별제는 합하여 6명을 두되, 제조는 호조 판서가 예겸하도록 하였다. 이 밖에 정3품 당하의 정 1명, 종3품 부정 1명, 종4품 첨정 1명, 종5품 판관 1명, 종6품 주부 1명, 종7품 직장 1명, 종8품 봉사 1명, 종9품 참봉 1명으로 규정되었다. 이속(吏屬)은 서원 5인 고직 1명, 사령 4명, 군사 1명이고, 차비노 100명, 근수노 13명이 속하였다.
예빈시의 주 업무는 사신의 접대로, 하마연·관소연·전별연 때 칙사와 통관(通官) 등에 대한 접대를 담당하였고, 국왕이 경사가 있거나 신하들의 노고를 치하할 일이 있을 때 베푸는 선온(宣醞) 때에도 육회나 탕(湯) 등을 준비하여 올렸다. 『육전조례』에는 특별히 실록세초(洗草) 때 총재관 이하의 선온에 대해서도 규정하고 있는데, 이때는 면(麵)과 병(餠)·탕(湯)·편육(片肉)·청밀(淸蜜)·초장(醋醬)을 내놓기도 하였다. 예빈시는 이 밖에도 종묘에 친향하는 날에 향관(享官)과 제집사(諸執事)에 대한 식사 제공을 담당하였고(『태종실록』 14년 1월 10일), 진향(進香)이나 노제(路祭)·치제(致祭) 제물을 준비하기도 하였고, 무과 방방 때 사용하는 어사화를 제작하기도 하였다. 특히 이를 위해 화장(花匠) 6명이 배속되어 있었다.
예빈시에서는 이 같은 각종 음식물 등의 조달을 위해 전구서 등과 같이 염소나 양·돼지·오리·기러기·닭 등을 사육하기도 하였고, 공물로 점미(粘米)·목맥미(木麥米)·진유(眞油) 등을 공물로 징수하거나 별도로 준비하여 구비하였다.
예빈시의 관사는 초기에는 의정부 남쪽에 두었다가 뒤에 서부 양생방(養生坊)으로 이전하였으며, 1778년(정조 2)에 다시 남부 회현방(會賢坊) 남별궁(南別宮) 안으로 옮겼다.
변천
1675년(숙종 1) 참봉을 감하고 다시 직장을 두었으며, 1721년(경종 1)에 정을 혁파하였다. 1742년(영조 18)에는 별제 2원을 감축하고 참봉 2원을 더 증설하였다. 이후 영조대 편찬된 『속대전』에서는 정6품 이상의 모든 관원, 즉 정·부정·제검·첨정·별좌·판관·별제 등을 혁파하였다. 이로써 주부 1인, 직장 1인, 봉사 1인, 참봉 2인으로 구성됨으로써 종래 정3품 아문에서 종6품 아문으로 축소, 격하되었다. 1894년(고종 31)에 혁파되었다.
참고문헌
- 『육전조례(六典條例)』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