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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1:51 기준 최신판



대한제국 때 조직한 왕실의 서양식 군악대.

개설

서구 열강의 영향으로 서양 문물이 유입되던 대한제국 시기에 1900년 「군악대설치건」에 따라 서양식 군악대가 조직되었다. 이후 군악대는 궁중 전통 음악을 연주하는 아악대와 구별하여 양악대라고 불렸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증보문헌비고』에 따르면 1900년 설치령이 반포되었을 당시 군악대는 고종의 친군(親軍) 시위연대에 속했다. 악사들은 군악대의 트럼펫 등 관악기와 드럼 등 타악기를 연주했다. 이들은 대한제국, 일본, 중국,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오스트리아, 벨기에, 이탈리아, 스페인 등 여러 국가의 애국가, 국민가, 행진곡, 가곡, 무도곡 등을 연주했다. 군악대는 1901년 한국에 온 독일인 에케르트(Eckert, Franz)를 대장으로 하여, 1901년 9월 7일 고종황제 탄신 50주년 기념연과 명성황후의 장례식, 원유회(園遊會) 등의 서양식 연회 등 다양한 국가 의례에서 연주를 담당했다. 뿐만 아니라, 시민들을 위한 탑골 공원 공개 연주회에서도 연주했는데 이것은 일제가 왕실의 권위를 격하시키기 위해 개최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1907년에는 군악대가 폐지된 후, 군악대 일원이 장례원 장악과에 양악대로 흡수되면서 군악대라는 명칭이 양악대로 바뀌게 되었다.

조직 및 역할

1915년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양악대는 양악사장(洋樂師長) 1명, 양악사(洋樂師) 2명, 양악수장(洋樂手長) 8명, 양악수(洋樂手) 33명, 사정(仕丁) 1명으로 구성되었다. 양악사장은 음악 감독이었고, 양악수장은 양악대의 일원으로서 양악수들을 지도하는 위치에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백우용이 양악사장을 지냈고, 강홍준과 김창희가 양악사로 임명되었다.

변천

1907년 장례원 장악과로 군악대원들이 흡수되면서 군악대를 양악대로 불렀다. 이와 함께 군악 악사장과 악사는 ‘국악사장’, ‘국악사’와 구별하여 ‘악사장’, ‘악사’라고 불렸다. 한일합방 이후에는 ‘아악사장’, ‘아악사’와 구분하여 ‘양악사장’, ‘양악사’라고 불렸다. 1915년에는 양악대가 완전히 폐지되었고 양악대원들은 민간으로 흩어졌다. 1916년 독일인 군악대장 에케르트가 사망했다. 당시 악사장이었던 백우용은 이후 흩어진 양악대원들을 모아 민간에서 경성악대를 조직하여 활동하기도 했고, 이왕직 아악부의 전통 음악 채보 사업에 참여하기도 했다.

참고문헌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송방송, 『(증보)한국음악통사』, 민속원, 2007.
  • 송방송, 『한국 전통음악의 전승 양상』, 보고사, 2008.
  • 이정희, 「대한제국기 군악대 고찰」, 『한국음악연구』44, 2008.
  • 이정희, 「대한제국기 원유회 설행과 의미」, 『한국음악연구』45,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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