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유회(園遊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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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든파티(garden party)를 표방한 서양식 연회(宴會)로, 궁궐 내의 후원이나 전각에서 수천 명의 손님을 초대하여 설행.

개설

1895년(고종 32)에 창덕궁 후원에서 청일전쟁 직후에 원유회가 설행된 이래, 창덕궁과 경복궁 등 궁궐의 후원과 전각에서 원유회가 설행되었다. 가든파티 형식의 서양식 연회로, 1,000명에서 4,000명까지의 손님이 초대되었으며, 황실 및 고관대작이 참여하였고 여성이 동반되는 형식이었다. 1904년 이후 더욱 성행하였으며, 조선 시대의 왕실 연향과는 달리 서양 요리·조선 요리·중국 요리가 함께 제공되고 청·일본·조선의 기예가 뒤섞여 궁궐을 야유회장으로 사용하여 전통적인 연향을 파괴하였다.

연원 및 변천

원유회가 처음 설행된 것은 1895년 6월 6일 창덕궁 연경당에서였다. 이때 청일전쟁 직후에 동학 난이 진정되고, 청으로부터 독립을 축하하기 위하여 원유회를 열었다. 원유회의 위원장은 개화파 관료였던 김가진(金嘉鎭)이었으며, 중앙과 지방의 신사와 상인에게 초대장을 보내 초청하였다.(『고종실록』32년 5월 10일 3번째 기사).

1904년(고종 41)부터는 원유회가 빈번히 이루어졌다. 원유회는 크게 일본 측에서 설행한 것과 대한제국 황실 측에서 설행한 것으로 나눌 수 있다. 일본 측에서 설행한 원유회는 1904년 10월 26일 경성 일본 부인회가 창덕궁 후원에서 원유회를 개최하였으며, 1905년 5월 26일에는 경부철도 개통식 기념 원유회를 내외국인이 참석한 가운데 창덕궁 후원에서 개최하였다. 1906년 4월 2일에는 통감부 설치 기념으로, 1907년 10월 29일 일본 황태자 방문 기념으로 경복궁 경회루에서 원유회가 열렸다. 황실 관련 원유회로는 1906년 9월 13일 고종의 탄신일인 만수성절 기념 원유회를 경복궁 후원에서 개최하였으며, 1908년 3월 11일에는 순종의 탄신일인 건원절 기념 원유회를 창덕궁 후원에서 행하였다.(『순종실록』1년 3월 11일).

원유회는 궁궐에서만 이루어진 것도 아니었다. 일본 황태자의 방한 때 수고한 일본인들을 위한 원유회를 통감부에서 설행하는가 하면, 진고개에 거류하는 일본인들은 남산에서 원유회를 열기도 하였으며, 학부 주최의 원유회를 석파정에서 열기도 하였다. 이처럼 원유회는 처음에는 황실 중심으로 이루어지다가 시일이 지날수록 관청 또는 민간인들에게 확산되어 갔다.

절차 및 내용

원유회는 주최자에 따라 참석 인원 및 범주에 차이가 있었다. 원유회를 개최하기로 하면 먼저 장소와 시간을 정하고 청첩하는 초대장을 발송하였다. 참석자는 원유회의 성격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고종, 순종, 순정효황후, 주임관, 칙임관, 통감, 부통감, 각국 영사와 공사, 고문관, 외국인 교사, 상인, 신문사 사장, 그리고 그들의 부인들이 참석하였다.

원유회는 야외 공간에서 음식을 차려놓고 즐기는 가든파티 형식이었기 때문에, 참석자들은 한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원유회장 곳곳을 돌아다니며 상이나 탁자에 차려진 음식을 서서 먹고 마시면서 즐기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이때 차려진 음식은 한국 요리뿐 아니라 서양 요리와 중국 요리도 함께 제공되었으며, 맥주, 탄산수, 샴페인, 위스키 등 서양 술도 제공되었다. 또 과자와 각종 담배도 준비되어 있었다. 각국의 요리가 제공되었다고는 하지만 대체로 서양식 차림이었다. 이러한 원유회는 초대 인원에 따라 차이는 있었지만 대체로 2,500원 내외의 경비가 들었다.

원유회장에는 조선의 전통예술과 일본의 전통예술, 양악이 공존하였다. 이를 위해 기녀(妓女), 고인(鼓人), 일본의 게이코(藝妓), 군악대 등이 동원되어 원유회의 흥을 돋우었다.

생활·민속적 관련 사항

원유회에는 한 번에 1,000명에서 4,000명 정도의 인원이 참석하였으므로, 조선시대 궁궐에서 열리던 연향과는 그 양상이 매우 달랐다. 전통적인 연향은 한정된 인원이 내진연, 외진연에 따라 해당 전각에서 음식을 들며 가무를 즐기는 방식이었으나, 원유회는 야외 공간에 음식을 차려놓고 서서 돌아다니며 즐기는 방식이어서 전통적인 연향과는 매우 달랐다. 원유회에 초청된 인사의 수효도 기존 궁궐의 연향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인원이었다. 또한 서양 요리, 조선 요리, 중국 요리 등이 섞이고, 조선의 전통예술과 일본의 전통예술, 양악 등이 혼재되어 매우 복잡한 양상을 띠었다. 궁궐의 후원이나 전각이 많은 사람들의 놀이공간으로 제공됨으로써 궁궐의 존엄성이 손상되는 측면도 없지 않았다.

이러한 원유회는 궁궐에서부터 시행되었으나 점차 민간으로 퍼져나갔고, 일제 강점기 이후에는 야유회와 같은 풍속으로 자리잡았다.

참고문헌

  • 『大韓帝國 官報』
  • 『大韓每日申報』
  • 『大韓民報』
  • 『續陰晴史』
  • 이정희, 「대한제국기 원유회(園遊會) 설행과 의미」, 『한국음악연구』제45집,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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