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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1:51 기준 최신판



1. 교린의 대상국인 여진, 일본, 유구에서 조선에 사인(使人)이 왔을 때 서계를 전달하고 향응을 베풀던 장소.

2. 조선시대 양반들이 손님을 접대하는 장소.

내용

1. 임진왜란 이전에는 일본국왕사를 비롯한 조선에 들어온 일본 사자(使者)들은 상경하여 왕을 배알하고 객청에서 외교문서를 전달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임진왜란 당시 대마도의 ‘왜병향도(倭兵嚮導)‘가 문제가 되었기 때문에 임진왜란 이후 일본 사자의 상경이 금지되었다. 이에 조선 왕의 전패를 부산 왜관의 북쪽 객사(客舍, 일본에서는 殿牌所 또는 숙배소)에 설치하여 여기에서 왕에 대한 배알을 대신하였다.

일본 사자가 도항해 오면 조선 측은 접위관의 주관 하에 동래부사와 부산첨사가 접대에 참여하였다. 가장 먼저 이루어지는 접대인 다례(茶禮)는 연대청(宴大廳, 연향대청이라고도 함)에서 이루어졌는데 이 자리에서 사자의 서계가 전달되었다. 다례를 마친 후 봉진연(封進宴)이 행해졌는데, 봉진연은 조선 왕에 대한 숙배가 목적인만큼 객사에서 행해졌다. 일본 사자들의 다례 및 봉진연의 절차가 끝나면 연대청에서 사자들을 위한 연향이 있었다. 연향청에서의 연향은 당시 동래부사와 왜관 관수 및 차왜가 직접 대면하여 교섭을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현안을 상의할 수 있는 외교 교섭의 중요한 기회가 되기도 하였다.

2. 조선시대 양반들이 손님을 접대하기 위하여 마련해 놓은 대청이나 방으로, 제사 등이 있을 때 손님들이 그곳에 거처하기도 하였다.

용례

1. 日本國源義持使臣亮倪詣闕 進書契獻土宜 命饋于客廳(『세종실록』 1년 12월 17일)

2. 正言趙復陽啓曰 頃者伏聞有綾原大君家客廳造給之命 臣竊以爲非矣(『인조실록』 22년 4월 18일)

참고문헌

  • 『변례집요(邊例集要)』
  • 『통문관지(通文館志)』
  • 『증정교린지(增正交隣志)』
  • 이훈, 『조선후기 표류민과 한일관계』, 국학자료원,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