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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남해 미조항에 설치한 수군진영.

개설

미조항은 남해에서 육로로 80리, 적량(赤梁)에서 40리, 평산포(平山浦)와는 60리 떨어진 곳에 있다. 15세기에 왜인이 남해로 몰려오자, 1489년(성종 20) 미조항에 소규모 보(堡)를 쌓고 군졸을 파견하여 왜선을 방어하였다(『성종실록』 20년 9월 21일). 16세기에 남해가 왜인들의 소굴로 변하자, 미조항에 수군진을 설치하였다. 미조항진에 파견된 수군첨사는 남해·상주포·사량·당포 등지를 관할하였다(『중종실록』 39년 9월 26일).

설립 경위 및 목적

15세기 전 광양현감 강희려(姜希呂)가 “남해의 남쪽 포구에 입지한 미조항에 병선을 파견하여 왜선을 방어하자.”고 제안하였다(『세종실록』 14년 4월 16일). 왜냐하면 경상도 남해현에 왜인들이 몰려와서 고기를 잡고 해산물을 채취하였기 때문이다. 15세기 말엽에 왜인들이 섬 주민들을 약탈하자, 중앙 정부는 미조항에 소규모 보(堡)를 쌓고 육군을 파견하였다. 1544년(중종 39)에 바다로 침입해 오는 왜선을 방어하기 위해 미조항에 수군첨사를 파견하였다(『성종실록』19년 5월 10일).

조직 및 역할

16세기 미조항에 수군진이 설치되고, 수군첨사가 파견되었다. 초대 미조항첨사는 당상관 무관을 임명하여 남해안을 방어하도록 하였다. 19세기에 삼군부(三軍府)에서 거창과 금산 지역에 별포군(別砲軍)을 편제하였는데, 이때 미조항진에 별포무사(別砲武士) 50명이 배치되었다(『고종실록』 8년 6월 11일).

변천

조선전기부터 미조항에 왜선이 출몰하였다. 특히 일본의 대마도인들이 고초도(孤草島)로 고기잡이를 하러 갈 때 남해의 미조항에 머물면서 식수와 땔감을 구하였다(『성종실록』 19년 4월 5일). 이후 미조항에 정박한 왜인들이 섬 주민들을 약탈하였다. 이에 조선 정부가 남해에 육군을 파견하여 연안지역을 방비하도록 하였으나, 바다에 출몰하는 왜선을 육군이 방어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그리하여 1544년(중종 39) 미조항에 수군을 파견하여 남해안의 방어망을 구축하였고, 1871년에 전선·병선·사후선 등 3척을 배치하였다.

1895년에 지방행정제도가 개편되면서 수군진이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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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영남읍지(嶺南邑誌)』
  • 「미조항진지도(彌助項鎭地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