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화서(圖畵署)"의 두 판 사이의 차이
(XML 가져오기) |
(차이 없음)
|
2017년 12월 10일 (일) 01:45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
대표표제 | 도화서 |
한글표제 | 도화서 |
한자표제 | 圖畵署 |
상위어 | 예조(禮曹), 속아문(屬衙門) |
하위어 | 제조(提調), 별제(別提), 선화(善畵), 선회(善繪), 화사(畵史), 회사(繪史) |
동의어 | 도화원(圖畵院) |
관련어 | 화원(畫員), 기술직(技術職), 잡직(雜織), 군직(軍職), 겸직(兼職), 체아직(遞兒職), 취재(取才), 검거(檢擧), 무록관(無祿官), 화학생도(畵學生徒) |
분야 | 정치/행정/관청 |
유형 | 집단·기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장경희 |
폐지 시기 | 대한제국기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도화서(圖畵署) |
궁중에서 필요한 그림을 전담한 관서.
개설
조선시대에 그림을 전담하는 기구로 태조부터 예종대까지는 도화원이, 성종대부터는 도화서가 설치·운영되었다. 도화서에는 직업 화가인 화원(畫員)이 소속되어 국가의 제반 그림 업무를 전담하였다. 도화서에 소속된 화원들은 기술직 또는 잡직에 해당하였다. 이들 화원 중 몇몇은 군직(軍職)이라 하여 국가에서 녹봉을 받았다. 승진에 제한을 받았기 때문에 화원으로서 진급할 수 있는 최고의 직위는 별제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도화원은 고려의 그림 관련 기구로서 조선 초기까지 존속되었으며, 1471년(성종 2) 이후 도화서로 개칭되었다. 1469년(예종 1)부터 1485년(성종 16)까지 국가의 법전인 『경국대전』을 편찬할 당시 기술적 성격을 가진 관청들의 직제가 원(院)에서 서(署)로 격하되었는데, 그림 관련 일[繪事]을 관장하는 도화원 또한 마찬가지였다.
도화서에서는 왕이나 왕후의 어진을 제작하였으며, 이를 통해 왕위 계승의 정통성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또한 중국 역대 명군(名君)과 현비(賢妃)의 사적(史蹟)을 병풍으로 제작하고, 「삼강행실열녀도」를 간행하는 등 도화서의 설치는 왕권을 강화하려는 목적이 강하였다. 왕실에서 거행하는 주요 행사를 그림으로 그리는 기록적 역할도 가지고 있었다.
조직 및 역할
도화서의 조직과 구성은 『경국대전』에 규정되어 있다. 도화서는 예조(禮曹)에 소속된 종6품 아문으로서 제조 1명과 별제 2명, 잡직으로서 화원 20명이 소속되어 있었다. 제조는 도화서를 총괄하는 총책임자이고 예조 판서가 겸직하였다. 제조는 도화서의 관원을 검찰하고 포폄하는 기능을 수행하며, 그림에 능통한 당상관이 겸직하였다. 제조는 매일 도화서에 출근하고 그 상황을 3개월마다 왕에게 보고해야 하며 별도의 녹봉은 지급되지 않았다.
별제는 종6품 경관직으로 전문성을 바탕으로 제조를 보좌하였다. 특히 화원의 재능을 시험하여 뽑는 취재(取才)와 검거(檢擧)에 영향을 행사하였다. 별제는 무록관(無祿官)으로 녹봉이 지급되지 않았지만 근무 일수가 차면 정직(正職)으로 서용되는 이점이 있었다.
화원의 정원은 처음에는 40명이었으나 나중에는 20명으로 정해졌다. 그림에 소질이 있는 화원은 취재한 후에 품계에 따라 관직을 받았으며, 화원은 현직에 있거나[時仕] 퇴직하거나[仍仕] 계속 화업에 종사하였다. 화원은 3개월마다 취재를 통해 우수한 사람을[居首] 선발하여 군직(軍職)에 서용하였다. 도화서의 관직은 호군·부사직·도화원 별좌·절충장군·종8품 화사(畵史)·주부이며, 이 외에도 군직을 지급받기도 했다.
화학생도(畵學生徒)는 기본적으로 학생이지만 도화 업무를 담당한 준화원이었다. 그림 그리는 재능이 뛰어난 소년을 선발하여 도화서에 소속시키고 전문적인 교육을 통해 화원으로 성장시켰다.
도화서의 시파치는 2품 이상의 고위 관료의 서자를 위해 마련된 직제였다. 시파치는 군역과 부역이 면제되고 체아직이 지급되었으며, 5품으로 옮겨 간 후에는 행직(行職)으로 제수될 수 있었다. 그러나 1467년(세조 13) 폐지되고, 『경국대전』에는 2품 이상 첩의 소생이 도화서에 입속할 수 있다는 부분만 반영되었다.
재랑은 양인 출신의 20세 미만 소년으로서 임시로 회화 활동에 참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의 임무와 신분은 화학생도로 계승되면서 그림 교육이 이뤄져, 화학생도의 직제가 생기기 이전에 운영되던 과도기적 직제이다.
그 밖에 도화서에는 근수노(跟隨奴) 2명과 차비노(差備奴) 3명이 설치되었다. 나중에는 작품의 배접(褙接)이나 표구를 담당하는 배첩장 2명이 보강되었다.
변천
조선시대에 그림을 전담하는 기구는 태조부터 예종대까지는 도화원이 있었고, 이후 『경국대전』부터는 도화서로 바뀌어 기록되었다. 도화원은 속아문으로서 본래 실안도제조 1명과 실안부제조 1명이 배치되어 있었다. 실안도제조는 좌의정 또는 우의정이 겸임하고, 실안부제조는 지신사(知申事)가 겸임하였다. 그러나 1426년(세종 8) 관제 정비를 통해 제조 1명으로 대치되었으며, 성종대 도화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중기 이후 도화서 화원들은 직업과 기능이 세습되면서 가문을 이루어 중인 가문을 형성하게 되었다. 대표적인 화원 가문으로 17세기에는 인동장씨와 양천허씨 가문이, 18세기에는 경주김씨와 개성김씨 가문이 있다.
조선후기에 들어 도화서의 제도나 인원수에 대한 개편은 『속대전』, 『대전통편』, 『대전회통』 등 법전을 개수할 때마다 반영되었다. 『속대전』에 의하면 화원의 정원은 20명에서 30명으로 증가했으며, 생도 또한 20명이 증가하였다. 그리고 전자관(篆字官) 2명을 새로 신설하였다. 이것은 17~18세기에 급격하게 늘어난 그림의 수요를 반영하는 것으로, 군직체아 또한 종6품 2명, 종7품 1명, 종8품 1명으로 원래보다 1명을 더 두게 되었다. 한편 정조 초기에 별제 2명을 폐지하였으며, 이미 17세기부터 활동하던 화학교수(畵學敎授) 1명을 1865년(고종 2)에 『대전회통』을 편찬할 때 법전에 수록하기도 하였다.
조선후기까지 존속하던 도화서는 조선 말기에 폐지되었으나 정확한 시기는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18세기 말부터 시장 경제가 활성화되면서 그림의 유통도 활성화되어, 19세기 말엽에 국가 조직의 일부분으로 존속하다가 와해된 것으로 여겨진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안휘준, 『한국회화사연구』, 시공사, 2000.
- 윤희순, 『조선 미술사 연구: 민족미술에 대한 단상』, 서울신문사, 1946.
- 이동주, 『우리 옛그림의 아름다움: 전통회화의 감상과 흐름』, 시공사, 1996.
- 강관식, 「조선말기 규장각의 자비대령 화원」, 『미술자료』58, 1997.
- 강관식, 「조선말기 규장각의 자비대령 화원(하)」, 『미술자료』59, 1997.
- 강관식, 「조선후기 규장각의 자비대령화원제」, 『간송문화』47, 1994.
- 김동원, 「조선왕조시대의 도화서와 화원」, 홍익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81.
- 박정준, 「조선시대 도화서와 화원의 신분 연구」, 조선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9.
- 배종민, 「조선초기 도화기구와 화원」, 전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5.
- 안휘준, 「조선왕조시대의 화원」, 『한국문화』9, 1988.
- 윤범모, 「조선시대 도화서 제도의 성립」, 『동국사학』17, 1982.
- 윤범모, 「조선전기 도화서 화원의 연구」, 동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79.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