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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성균관과 향교의 문묘 안에 있는 공자의 위패를 모신 전각.

개설

대성전은 동무(東廡), 서무(西廡)와 함께 문묘를 구성하는 주된 건물이다. 대성전은 공자를 비롯하여 사성(四聖), 십철(十哲), 송조(宋朝) 육현(六賢)의 위패를 봉안한 곳이며, 음력 2월과 8월 처음 정(丁)이 든 날에 석전(釋奠) 또는 석채(釋菜)라 불리는 제사를 행하던 곳이다. 동무와 서무에는 대성전에 모시지 못한 중국과 우리나라의 선현을 나누어 모셨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성균관 대성전은 1398년(태조 7)에 창건되었고, 1400년(정종 2)에 소실되었다가 1407년(태종 7)에 재건되었다. 공자를 비롯하여 사성·십철·송조 육현의 위패를 모셔 놓고 제사 지내기 위한 사당으로써, 명륜당 앞에 있다. 대성전에는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이라 적힌 공자의 신위가 중앙 가장 높은 곳에서 남쪽을 바라보고 있고, 안자(顔子)·자사(子思)의 신위는 공자 앞 동쪽, 증자(曾子)·맹자(孟子)는 서쪽에서 서로 마주 보고 있다. 동·서의 양 벽에는 십철과 육현이 각각 8위씩 나누어 배향(配享)되어 있다.

지방의 군현 향교에도 성균관과 같이 문묘 안에 대성전을 건립하고 그 안에 공자를 중심으로 사성과 십철 등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그러나 동무와 서무는 8도 계수관 향교에만 있었고, 그 외 군현의 향교에는 두지 않았다.

조직 및 역할

음력 2월과 8월 처음 정(丁)이 든 날에 석전 또는 석채라 불리는 제사를 행한다. 대성전의 봉향은 제사에 참여한 유생 가운데 가장 뛰어난 자에게 맡기므로, 한 번 뽑히고 나면 곧 장의(掌議)가 되는 계기가 된다. 대성전 안의 동·서 종향(從享)과 동·서무의 분헌관들은 공자 및 사성에 대한 종헌(終獻)이 끝나기를 서서 기다렸다가 전작(奠爵)과 함께 예를 행하며, 유생들도 따라서 예를 행한다. 동·서무에 가서는 상두(上頭)가 분향한 후, 열 사람이 열 분의 위패에 제물을 올리고 이하는 차례로 예를 행한다.

매달 5일과 10일에 쓸고 닦는 예를 행하는데, 장의가 없으면 반수(班首)가 그를 대행하여 수복(守僕)들을 거느리고 대성전 안과 공자와 아성인 안자·증자·자사·맹자 아버지의 위패를 모신 계성사(啓聖祀)를 살펴본다. 세자가 성균관에 입학할 때 거행하는 속수례(束脩禮)에도 대성전에 들어가 제사를 지내는 절차가 있다[『세종실록』 3년 12월 25일]. 알성시(謁聖試)를 거행하기 전에도 왕이 대성전에 들어가 잔을 올리고 절을 한다.

변천

성균관 대성전의 액자(額字)는 처음에는 대성전(大聖殿)이라고 썼다가 중국 사신의 지적을 받고 1453년(단종 1)에 대성전(大成殿)으로 고쳐 썼다. 또 1474년(성종 5)과 1507년(중종 2)에 중수하였고,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01년(선조 34)에 재건하였다.

형태

성균관과 향교는 그 지형과 관련되어 대개 평지에는 북쪽으로 앞에 공자와 성현의 위패를 배향한 문묘 등을 조성하고 뒤에 유생을 교육하는 명륜당 등을 조성하는 전묘후학(前廟後學)의 구조로 건축되고, 경사지에는 높은 곳에 문묘 등을 낮은 곳에 명륜당 등을 조성하는 고묘저학(高廟底學)의 구조로 건축되었다.

성균관 대성전의 규모는 남북 4영, 동서 5영의 20칸이었다. 지방 군현향교는, 밀양 도호부향교의 대성전이 동서 5영이고 남북 3영의 15칸이었듯이 성균관 대성전에 비해 규모가 작았다.

참고문헌

  • 『증보동국문헌비고(增補東國文獻備考)』
  • 『반중잡영(泮中雜詠)』
  • 『태학지(太學志)』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