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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1:40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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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궁각계 |
한글표제 | 궁각계 |
한자표제 | 弓角契 |
상위어 | 공계(貢契) |
하위어 | 수우각(水牛角) |
관련어 | 내상(萊商), 대일무역(對日貿易) |
분야 | 경제/재정/공물·진상 |
유형 | 집단·기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후기 |
왕대 | 숙종대~철종대(?) |
집필자 | 이욱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궁각계(弓角契)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영조실록』 10년 1월 5일 |
1694년(숙종 20) 물소 뿔의 원활한 공급을 위해 설립한 공계(貢契).
개설
물소 뿔인 수우각은 활의 재료로써 전적으로 수입에 의존하는 품목이었다. 그러다 보니 수우각의 수입이 원활하지 못하면 활의 제작에도 큰 차질이 빚어졌다. 이에 따라 조정에서는 수우각 수입을 독점·전담하는 궁각계를 설치하여 수우각을 원활하게 공급받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수우각은 궁각계 운영에도 불구하고 공급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고, 수우각의 값으로 제공하던 동(銅)과 납마저 부족해지자 궁각계를 폐지하기도 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일본에서 수입하는 수우각은 주로 내궁방이나 군기시 등 각 군문에서 만드는 활의 재료로 사용되었고, 중국에 세폐(歲幣)로도 보냈다. 중국에 대한 세폐가 없어진 1654년(인조 5) 이후로 수우각은 국내 수요에만 조달되었다.
공무역을 통해 동래부에서 수우각 등을 호조(戶曹)에 납부하면 호조에서는 내궁방에서 사용하는 것을 먼저 지급하고 나머지는 중앙의 군문이나 지방의 영읍에서 구입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군문뿐만 아니라 내궁방에 수우각을 조달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수우각의 수입 경로가 복잡하여 수입 자체가 쉽지 않았으며, 또한 훈도 등의 역관이 동래상인과 결탁하여 사사로이 매매하면서 상납을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수우각이 정해진 날짜 안에 상납되지 않는 것은 당시의 고질적인 폐단이었다. 이에 대한 개선책으로 수우각의 조달을 전담하는 공계를 신설하였다. 이 신설된 공계를 수우각, 즉 궁각을 조달하는 공계란 의미에서 궁각계라고 불렀다. 궁각계의 신설은 1694년(숙종 20) 2월 호조판서 오시복(吳始復)에 의해 건의되었다. 호조에서 궁각 구입을 전담할 사람 몇 명을 모아서 그들에게 값을 정가보다 조금 높게 지급하고, 대신 잠상(潛商)을 엄금하면 궁각을 원활하게 조달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설립된 궁각계는 당시 수우각 무역을 독점하던 역관과 동래상인 중에서 수우각의 원활한 조달을 도모하는 조정의 시책을 충실하게 이행할 수 있는 사람을 뽑아서 조직되었다. 이로써 궁각계는 공무역은 물론 사무역을 통한 수우각 수입에서도 다른 상인에 대한 배타적인 독점권과 우위를 확보하게 되었다.
변천
궁각계의 형세는 1694년 성립 이후 시대의 변천에 따라 부침이 있었다. 궁각계는 수우각 무역을 독점하여 종전보다 수입 가격을 낮추려고 하였다. 그러자 일본 측에서는 수출 가격이 낮아지므로 수출량을 억제하여 판매하지 않으려고 하였다. 이에 따라 공급이 부족해져 수우각 가격이 크게 올라 궁각이 조달되지 않는 등 여러 가지 폐단이 있었다. 이를 시정하기 위해 궁각계를 혁파하자는 논의가 나오게 되었다.
1750년(영조 26) 5월 궁각계의 공가(貢價)로 동과 납이 과다하게 지출되자(『영조실록』 10년 1월 5일), 동전 만들 재료인 동과 납을 원활하게 확보하기 위해 궁각계를 혁파하였다. 이는 박문수의 ‘궁각계에 지급하는 동과 납으로 동전 5~6만 냥을 주전할 수 있으므로 주전(鑄錢) 재료를 확보하기 위해 궁각계를 혁파하고 수우각은 호조에서 구입하여 납부하자.’는 주장에 따른 것이었다.
그런데 궁각계 혁파 후 호조에서 직접 수우각을 구입하려던 원래 의도는 그대로 관철되지 않았다. 이 방안을 주장했던 박문수(朴文秀) 스스로 1750년 8월에는 ‘기존 궁각계인을 제외하고, 새롭게 착실하고 재력이 있는 사람을 모집하여 궁각계를 다시 구성하자.’고 제안하였다. 이에 따라 3~4명을 새로 모집하여 궁각계를 편성하였다. 그러나 이들 역시 궁각 조달이 쉽지 않아 궁각계에서 탈퇴하려 하였고, 1756년(영조 32) 새로 5~6명을 추가로 모집하여 궁각을 조달하게 하였다.
이후 1750년에 편입된 공인과 1756년 추가로 모집된 공인 사이에 공인권을 둘러싸고 대립이 심하였다. 거기에 궁각 공급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고, 공가 지급마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궁각계 공인들은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들은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일본 이외에 중국에서도 수우각을 수입하여 공급 부족을 해결하려고 하였다. 또 공가 지급에서도 동 대신 돈으로 지급해 주도록 요구하였다. 동 수입 부족으로 공가를 제대로 지급받지 못할 뿐 아니라 화폐 주조가 활발하지 못하면 지급받은 동마저도 상품으로서의 가치가 없어지기 때문이었다. 이에 1781년(정조 5) 궁각계의 공가를 돈으로 지급하도록 하는 「궁각계변통절목(弓角契變通節目)」이 제정되어 그들의 노력이 실현되었다.
이후 1832년(순조 32)에는 대마번의 공무역을 통한 수우각 수출이 중단되었다. 수우각은 공무역 수입 대상에서 제외대고 대신 동을 수입하였다. 그런데 1861년(철종 12)에도 궁각계 공인은 조달하는 공물이 수입되지 않는 상황에서도 여전히 존재하였다. 1830년대 이후 궁각계 공인이 조달한 공물의 종류나 수우각 공급 경로, 그리고 수우각 수입 중단 이후 궁각계 공인의 대처 방안 등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참고문헌
- 김동철, 「조선 후기 수우각 무역과 궁각계 공인」, 『한국문화연구』 4,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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