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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1:40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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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금부옥 |
한글표제 | 금부옥 |
한자표제 | 禁府獄 |
하위어 | 남간(南間), 서간(西間) |
관련어 | 의금부(義禁府), 조옥(詔獄), 순군옥(巡軍獄), 왕옥(王獄) |
분야 | 정치/사법/재판 |
유형 | 집단·기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왕대 | 태종~영조 |
집필자 | 정순옥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금부옥(禁府獄)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태종실록』 14년 12월 2일, 『광해군일기(중초본)』 12년 5월 16일 |
조선시대 사형죄수와 같은 중범죄자와 관료 및 양반 계급의 범죄자를 다스리던 의금부 감옥.
내용
금부옥(禁府獄)은 왕옥(王獄) 또는 조옥(詔獄)이라고도 한다. 의금부 관할로 사형죄인과 같은 중죄인을 잡아다가 국문하거나, 관인(官人)이나 양반 계급 범죄자를 감금하던 곳이었다.
조선시대 옥(獄)을 관장하는 관서로는 형조와 의금부가 있었다. 형조가 관할하는 전옥서(典獄署)는 죄수의 구금과 행형(行刑)을 담당하던 관서로 주로 도적과 난폭자의 죄를 다스렸다. 금부 즉 의금부에 딸린 감옥을 의금옥(義禁獄), 조옥(詔獄), 금부옥(禁府獄)이라 하였는데 조정의 대옥(大獄) 및 중앙과 지방에서 지체된 어려운 사건 처리, 사대부의 하옥 및 강상에 관계된 죄인을 가두는 곳이었다. 조선초기에는 금부옥에도 잡범을 가두었으나 1408년(태종 8) 정월 이후에는 왕의 특명에 의한 죄수 이외에는 가두지 못하게 하였다. 금부옥에 갇힌 죄인을 심문하는 것을 조옥국문(詔獄鞫問)이라 하였다.
『경국대전』 「형전」 추단조에 의하면 사소한 죄는 각 아문에서 취급하지만 큰 죄는 형조, 사헌부, 한성부에서 처리하였으며 감옥은 의금부와 형조에 속한 전옥서에만 설치되어 죄인 수금과 관리를 철저하게 했다. 뿐만 아니라 중앙에서는 사헌부가, 지방에서는 관찰사가 옥에 갇힌 죄수를 학대하거나 부당하게 다루지는 않는지 감옥과 죄수의 상황을 감찰하였다. 만약 죄수가 감옥에서 사망하면 전옥서가 이러한 사실을 형조에 보고하고 형조는 한성부로 해당 문서를 보냈다. 왕명을 받들어 중죄를 다루는 의금부는 형조를 거치지 않고 직접 한성부로 문서를 보냈다.
용례
下臺諫 刑曹掌務及辨正都監提調柳廷顯 前刑曹判書成發道等義禁府獄 河崙復上書 論臺諫 刑曹亦誤決卞謙奴婢之事 上令承政院考覈本末(『태종실록』 14년 12월 2일)
趙纘韓啓曰 且於獄囚中 逆家奴婢及次知等數十名 則皆無養獄之人云 亦令禁府區處。且禁府獄間 癘疫大熾 自戶曹廩給逆獄人外 其餘舊囚二十餘名 皆無養獄之人 每於朝夕 粒粒乞哺於逆獄人 皆已垂斃之狀 臣曾目見於三省交坐時 極爲慘惻(『광해군일기(중초본)』 12년 5월 16일)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金淇春, 『朝鮮時代刑典』, 삼영사, 1990.
- 오갑균, 「朝鮮朝 鞫廳 運營에 대한 硏究」, 『湖西文化硏究』第3輯,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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