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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세와 기타 세금의 징수를 위하여 1895년 4월 탁지부(度支部) 산하에 신설한 기구.

개설

갑오개혁의 일환으로 시도된 조세 제도와 조세 징수 제도의 개혁을 위하여 1895년 징세서(徵稅署)와 함께 관세사가 신설되었다. 관세사는 지방 관청에서 독립된 조세 징수 기구로서, 조세의 징수와 지방 세무의 감독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은 1895년 9월 관세사가 폐지되고 관제사의 업무 일부는 세무시찰관에게 넘어갔다.

설립 경위 및 목적

1894년 6월부터 시작된 갑오개혁의 일환으로 제정된 여러 법령에 의해 재정 기구가 탁지아문(度支衙門)으로 일원화되었다. 대부분의 조세는 지세(地稅)로 통합하여 화폐로 징수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새로운 조세 징수 기구의 설치가 필요했다. 따라서 갑오개혁 초기인 1894년 9월에는 우선 ‘결호전봉납장정(結戶錢捧納章程)’을 제정하여 지세의 부과와 징수 과정을 분리하고자 하였다. 즉, 지세의 부과는 각 지역의 지방관과 서리에게 맡기되 징수는 향회(鄕會)에서 선출된 향원(鄕員)이 담당하도록 한 것이다. 이에 따라 종래 지세 징수를 담당하였던 지방관과 서리 층은 지세 징수 과정에서 배제되었다. 이러한 조치는 지방관과 서리 층의 중간 수탈을 방지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이 장정은 잠정적인 것에 불과하였고 본격적인 조세 징수 제도의 개혁은 다음 해인 1895년 3월에 반포된 ‘관세사급징세서관제(管稅司及徵稅署官制)’와 4월에 반포된 ‘각읍부세소장정(各邑賦稅所章程)’에 의해 이루어졌다(『고종실록』 32년 3월 26일) (『고종실록』 32년 4월 5일). 이것은 조세 부과와 징수 과정을 분리하여 부과는 각 지역에 설치되는 부세소에서 담당하고, 징수는 주요 지역에 설치되는 관세사와 징세서에서 담당하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지방 관청에서 독립된 조세 징수 기구로서 신설되는 독관세사와 징세서의 위치·관할구역은 탁지부 대신이 정하도록 하였다. 이들 기구가 실제로 얼마나 설치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관세사급징세서관제(管稅司及徵稅署官制)’에 관세사장(管稅司長) 9명, 징세서장 220명 등이 규정된 것으로 보아 그 수만큼 설치하려는 계획이 있었던 것 같다. 또한 『고종실록』에는 관세사장조민희(趙民熙)를 전주부관찰사(全州府觀察使)로 임용하였다는 기록이 있다(『고종실록』 32년 8월 16일). 이것으로 보아 일부 지역에 관세사가 설치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조직 및 역할

관세사에는 기관장으로 탁지부 대신의 지휘·감독을 받는 주임관인 관세사장이 전국적으로 9명 있었다. 직원으로는 판임관인 관세주사(管稅主事)가 전국적으로 45명 있었으며, 필요에 따라 예산 범위 내에서 고용원을 둘 수 있었다.

관세사는 탁지부 대신의 관리 아래에서 조세와 기타 세금의 징수에 관한 사무를 담당하였다. 또한 관할 구역 내의 징세서를 감독하고 각 지역 세무를 감사하는 역할을 맡았다.

변천

관세사, 징세서, 각 읍 부세소 제도는 지세의 부과와 징수 과정에서 한 번도 역할을 해 보지 못한 채 1895년 9월 5일 그 기능이 정지되었다. 같은 날 반포된 ‘각군세무장정(各郡稅務章程)’에 따라 조세 부과와 징수의 업무는 종전과 같이 지방관과 서리에게 돌아갔다. 다만 같은 날 탁지부에 주사 15명 이하를 임시로 더 두도록 하는 조치를 취하여 업무의 공백을 최소화하도록 하였다. 한편, ‘세무시찰관장정(稅務視察官章程)’을 반포하여 탁지부 대신의 명령에 따라 각 지역에 파견되어 지방 세무를 감독하는 23명 이하의 세무시찰관을 두도록 하였다. 이로써 관세사의 업무 가운데 일부는 세무시찰관에게 계승된 셈이 되었다(『고종실록』 32년 9월 5일).

참고문헌

  • 이윤상, 「1894~1910년 재정 제도와 운영의 변화」,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6.
  • 이윤상, 「갑오개혁기 근대적 조세제도 수립 시도와 지방 사회의 대응」, 『한국문화』29,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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