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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1:23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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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자염 |
한글표제 | 자염 |
한자표제 | 煮鹽 |
상위어 | 염(鹽) |
동의어 | 공염(貢鹽), 세염(稅鹽) |
관련어 | 각염제(榷鹽制), 구황염(救荒鹽), 염간(鹽干), 염분(鹽盆), 염업(鹽業), 염호(鹽戶), 제염(製鹽), 천일제염(天日製鹽) |
분야 | 경제/산업/수산업 |
유형 | 음식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조선 |
집필자 | 송양섭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자염(煮鹽) |
농도를 진하게 만든 바닷물을 끓여낸 결정으로 만든 소금.
개설
바닷물 속에 포함된 염분을 농축시킨 다음 그것을 고아낼 큰 가마인 염분(鹽盆)에 넣고 끓여 만든 소금을 자염(煮鹽)이라고 한다. 자염의 생산 방식은 지역과 자연 조건에 따라 크게 2가지로 구분된다. 간석지가 발달하지 못한 경상도 등 동해안의 경우 염전의 조성이 어려워 바닷물을 직접 염분에 넣고 끓이는 해수직자식(海水直煮式), 간석지가 발달한 서·남해안의 대부분 지역은 염전을 조성하여 농후한 함수(鹹水)를 채취한 후 이것을 염분에 넣고 끓여 소금을 넣는 염전식(鹽田式)이었다. 이런 염전식이 조선시대 소금의 주된 생산 방식이었다. 염전식은 지역에 따라 무제염전식(無堤鹽田式), 유제염전식(有堤鹽田式), 양빈식(揚濱式)이 있다.
연원 및 변천
소금은 곡물과 더불어 민생의 중요한 필수 식품이다. 이와 같은 소금의 상품성에 착안한 고려는 14세기 들어 그 생산과 교역을 조정에서 장악하여 이를 국가재정의 기반으로 삼았다. 충선왕대 재정개혁의 일환으로 추진된 각염제(榷鹽制)는 애초 염호(鹽戶)로부터 일정액의 염세만을 징수하던 징세제(徵稅制)를 혁파하고, 전국의 모든 염분을 국가에 소속시켜 국가가 이를 전적으로 관리하는 소금의 전매제였다. 그러나 고려말에 이르러 전매제는 생산 부분에서의 염호의 도피에 따른 공급 부족, 유통 부문에서의 관리 감독관의 비리, 세력가의 염분 점탈에 따른 개인 염분의 성행 등으로 붕괴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 조정이 추진한 염제개혁의 기본 방향은 고려의 각염제를 폐지하는 데 있었다. 이제 정역호(定役戶)인 공염간(貢鹽干)은 신역의 일환으로 공염을, 사간(私干)은 염세만을 부담하면 되었다. 즉, 염분의 사적 소유를 인정하고서 이에 대해 세금을 부과하는 방향으로 국가의 염업정책이 바뀌었던 것이다.
만드는 법
서·남해안에서는 달의 상하현 때 바닷물이 물러간 후 써레를 단 소를 이용하여 염전 바닥을 하루 두세 번씩 갈아엎는다. 그 과정에서 갯벌의 흙이 햇볕을 쬐면서 소금기가 모래 알갱이에 많이 달라붙어 짠 흑, 즉 함토(鹹土)가 만들어진다. 다시 바닷물이 들어와 염전을 적시고 물러간 후 써레질을 반복하면 더욱 소금기가 강한 함토로 변하며, 이 함토는 소금기가 잘 달라붙도록 덩이판을 이용하여 잘게 부순다.
이렇게 여러 차례 되풀이하여 만든 함토를 염전의 안쪽에 1.5m의 깊이로 판 염정 주위로 나래질을 하여 긁어모은다. 여기에 다시 바닷물이 소금 결정체가 달라붙은 함토를 적시면 농도가 높아진 함수가 함수통에 고인다. 농도 15~18℃ 정도의 함수를 비바람을 피하기 위해 만든 염막 안에 물지게로 운반하여, 철이나 조개로 만든 솥(염분)에 넣고 끓여서 소금을 만든다.
그리고 갯벌이 없는 동해안 일부 지역에서는 염전 조성이 어려워 해안가에 인위적으로 점질토로 바둑판처럼 염전을 만든 또 다른 형태의 염전식이 있었다. 점질토로 염전 바닥을 조성한 다음 그 위에 바가지로 바닷물을 여러 차례 살포하여 소금기를 머금은 함토를 만들었고, 짠 흙에 다시 바닷물을 부어 함수를 채취하여 끓이는 형태였다.
생활·민속 관련 사항
소금 생산은 한 달에 상하현 기간인 12일 정도밖에 작업하지 못하고, 그것도 비가 오지 않는 봄가을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소금의 생산량은 한정될 수밖에 없었고, 자연히 그 가격은 매우 높아 쌀값의 절반 이상 되었다. 소금 생산은 날씨에 크게 좌우되었기 때문에 흔히 ‘하늘이 짓는 농사’라고 하였다. 하루 종일 땡볕에서 고된 노동을 하면서 땀을 식히고 피로를 풀기 위한 노동요와 민속놀이인 소금놀이 마당이 생겨나기도 했다.
자염 설비로는 염막, 염전, 섯등, 염정, 염조, 염부 등이 있었고, 실제 작업에는 가레, 쟁기, 써레, 나레, 들것, 목통, 물지게, 수채, 삼태기 등 재래 농기구가 동원되었다.
참고문헌
- 『대전회통(大典會通)』
- 박평식, 『조선전기 상업사연구』, 지식산업사, 1999.
- 고승제, 「李朝鹽制의 기본구조」,『논문집』3, 서울대학교, 1956.
- 김의환, 「조선후기 충청도의 소금생산과 생산방식」, 『조선시대사학보』28, 2004.
- 김의환, 「하얀 작은 황금, 소금 –생산에서 세금까지」,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1, 청년사, 2005.
- 홍금수, 「18~19세기 茁浦灣 煮鹽-鹽場의 분포와 煮鹽法을 중심으로」, 『대한지리학회』29, 1994.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