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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1:23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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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도미죽 |
한글표제 | 도미죽 |
한자표제 | 稻米粥 |
관련어 | 원미(元味), 원미죽(圓米粥), 쌀죽[米粥], 흰죽 |
분야 | 생활·풍속/식생활/음식 |
유형 | 음식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차경희 |
재료 | 쌀[米], 물[水]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도미죽(稻米粥)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세종실록』 19년 1월 13일, 『광해군일기』 6년 11월 1일, 『정조실록』 24년 6월 26일 |
불린 쌀에 물을 부어 끓인 쌀죽.
개설
멥쌀을 씻어 불린 후 물을 부어 푹 무르게 끓인 죽이다. 쌀죽 또는 흰죽이라고도 한다. 불린 쌀에 물을 부어 그대로 푹 끓이기도 하고, 맷돌이나 돌확에 굵게 갈아 쌀알을 부수어서 끓이기도 한다. 조선에서는 궁에서 아침 초조반(初朝飯)으로 올리거나 왕이나 왕족이 병이 났을 때 환자식으로 이용하였다. 또 진휼이 필요할 때 백성들에게 구황식(救荒食)으로 이용하기도 하였다.
만드는 법
만드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쌀을 깨끗하게 씻어 물을 부어 2시간 정도 불린 후 건져서 솥이나 두꺼운 냄비에 담아 쌀 부피의 5~6배의 물을 붓고 끓인다. 쌀이 충분하게 퍼지면 중간 불로 줄여서 수분이 푹 고루 퍼지도록 쑨다. 반투명한 상태의 미음 속에 잘 퍼진 쌀알이 어우러져 있으면 잘 끓여진 것이다.
또 다른 방법은 불린 쌀을 건져 돌확에 굵직하게 가는데 이때 참기름을 한두 방울 떨어뜨려 갈면 죽 맛이 더 부드럽다. 알맞게 갈린 쌀을 두꺼운 솥에 넣고 물을 쌀 양의 5배 정도를 부어 끓인다. 한소끔 끓으면 불을 중간 불로 줄인 후 나무주걱으로 고루 저으면서 바닥이 눌어붙지 않도록 끓인다. 쌀을 통으로 끓인 죽보다 먹기 쉽고 부드럽다.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에는 쌀죽을 쑤는 법으로, “곱게 찧은 쌀을 여러 번 씻어 불에 달군 솥에 참기름을 조금 두르고 쌀을 넣고 저어 기름이 다 스며들기를 기다린다. 그런 후 물을 많이 붓고 장작불로 계속 끓여 물이 반쯤 줄어들면 복자로 죽을 휘젓고 그 죽물을 그릇에 떠낸다. 또 복자로 솥 안의 죽 건더기를 으깨어 쌀알이 덩어리지지 않게 하고 다시 참기름을 넣어 골고루 섞어 약한 불로 끓인다. 복자로 떠낸 죽물을 한 복자씩 솥 안의 죽에 넣되 그 즙이 졸아들면 바로 첨가하여 끓이기를 첨가할 죽물이 없어질 때까지 하면 죽이 걸쭉하기가 우유죽과 같다. 새벽녘 빈속에 먹으면 좋고 노인에게 매우 좋다.”고 기록되어 있다.
『주식시의(酒食是儀)』에 기록된 흰죽은 “흰쌀을 물에 담가 우러나면 일어 놓고, 솥에 기름을 두른다. 왼 쌀은 물에 깨끗하게 씻어 건진다. 솥에 건져 솥에 참기름을 넣고 노릇노릇하게 볶아 쌀 일은 것과 합하여 쑨다. 간장을 곁들여 먹거나 장, 김치, 꿀을 입가심으로 먹는다.”고 하였다.
연원 및 용도
흰죽은 우리나라에서 벼농사가 지어진 후부터 먹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저장 시설이 부족했던 시절에는 쌀농사를 지어도 초여름부터 가을 수확 전까지는 쌀이 귀했다. 『목은집(牧隱集)』에는 이색(李穡)이 6월 보름 정도에 연로하던 길창군(吉昌君)을 임정(林亭)으로 찾아뵈었을 때, 차린 음식 중에 쌀죽이 있는 것을 보고 햅쌀죽[新米粥]이었나 하였는데, 저장을 잘 해 둔 쌀이었음을 듣고 감탄하여 시를 지었다고 한 내용이 있다.
『서애집(西厓集)』에 의하면 쌀죽을 군량(軍糧)으로 사용했다. 『성호사설(星湖僿說)』에는 “지금 사람은 이른 아침에 흰죽을 먹으며 이것을 조반(朝飯)이라 한다.”라고 하였으며, 한편 ‘자릿조반’이라고도 한다. 궁에서는 아침 수라 전 초조반으로 올렸고, 통신사절 등 많은 인원이 먼 곳으로 여행할 때에는 아침식사를 흰죽으로 하였다.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는 약천(藥泉)남구만(南九萬)이 구황에 솔잎을 가루로 만들어 하얗게 끓인 쌀죽에다 따뜻하게 복용하면 굶주림을 잘 견딜 수 있다고 하였다.
조선에서는 기근에 대한 구황식으로 쌀죽[稻米粥]이 제공되었으며(『세종실록』 19년 1월 13일), 감옥에 갇힌 자에게 원미죽[圓米粥]을 제공하기도 하였다(『광해군일기』 6년 11월 1일). 정조가 몸이 아파 잠도 못자고 수라도 잘 못 들자 약원(藥院)의 신하들은 원미(元味)라도 자주 드시면 유익하다고 하였다(『정조실록』 24년 6월 26일). 이렇게 쌀죽은 조반(朝飯)으로도 쓰였고, 부드럽고 소화가 잘되므로 환자들의 병인식이나 노인식으로 사용되었다. 또 적은 양의 쌀로도 많은 양의 죽을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진휼에도 쓰였다.
생활·민속적 관련 사항
젓갈이나 식해를 담글 때 쌀죽은 발효원으로 이용되었다. 술을 빚을 때 밑술에 곡물을 익히는 방식으로는 떡으로 찌거나, 밥을 짓거나, 죽으로 끓이는 법이 있다. 이때 죽으로 쑤면 술이 빨리 익는다.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의 갱미죽방(粳米粥方)에 “흰죽을 쑬 때는 만도미(晩稻米)를 쓰는 것이 좋다. 솥은 돌솥을 사용하는 것이 가장 좋고, 무쇠솥·놋쇠솥 순이다. 감천수(甘泉水)를 쓰는 것이 맛이 좋고, 물이 나쁘면 죽의 색이 누렇고 잘 쑤어지지 않는다. 죽을 쑬 때 사용하는 연료는 섶나무, 콩깍지, 거친 쌀겨인 조강(粗糠) 등이 좋다. 왜냐하면 불씨가 남고 솥 밑에 불이 닿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참고문헌
- 『목은집(牧隱集)』
- 『서애집(西厓集)』
- 『성호사설(星湖僿說)』
-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 『주식시의(酒食是儀)』
-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
- 윤서석, 『增補韓國食品史硏究』, 신광출판사, 19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