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장(末醬)"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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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1:22 기준 최신판



간장이나 된장을 담는 데 사용하는 재료.

개설

대두를 삶아서 맷돌이나 절구로 찧어 갈아서 덩어리를 만들어 짚에 싸서 따뜻한 곳에 두어 곰팡이가 필 때까지 띄운 것을 말한다. 보통 메주라고 부른다.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치선(治膳)」 ‘장제품(醬諸品)’에서는 시(豉)의 속칭이 말장이며, 다른 말로 훈조(熏造)라 한다고 하면서 당시 사람들은 이를 ‘머조’라고 부른다고 적었다. 머조는 『규합총서(閨閤叢書)』에서 며조, 그 이후에 메주로 그 음이 바뀌었다.

만드는 법

메주를 만드는 방법은 세조 때 간행된 『산가요록(山家要錄)』의 ‘말장훈조(末醬熏造)’라는 항목에 나온다. “정이월 안에 콩을 깨끗이 씻어 돌을 골라내고, 삶을 때 물이 넘치려 하면 물을 조금씩 떨어뜨려 가라앉힌다. 끓이는 동안 제일 위에 있는 콩을 꺼내어 손으로 눌러 껍질이 잘 벗겨지는지 보고 덜 익은 것 같으면 다시 무르게 삶아야 한다. 절구에 넣고 잘 찧어서 덩어리로 단단히 빚어 햇볕에 하루 종일 말리되 오전에 한 면을, 오후에 다른 한 면을 말리면 표면이 거의 마르게 된다. 이것을 섬에 넣고 아가리를 풀로 엮어 놓는데, 섬에는 짚을 반 자 가량 깔아 서로 겹치지 않게 한 벌만 놓고 다시 그 위에 볏짚을 두껍게 덮어 둔다. 7~15일이 지나 띄워져서 흰색이 돌고 퀴퀴한 냄새가 나면 말장(末醬)이 된 것이니 꺼낸다. 반씩 쪼개어 쪼개진 면이 볕을 보도록 하루 종일 쪼이고 다시 먼저처럼 섬에 담아 흰색으로 변하기를 기다린다. 만일 단단해지지 않으면 또 서너 조각으로 쪼개서 하루쯤 햇볕에 쪼여 다시 앞에 한 것처럼 섬에 담아 묻어 두면 시간이 가면서 저절로 띄워지고 마르니 꺼내서 볕에 쪼여 말린다.”

그 밖에 『산림경제(山林經濟)』「치선(治膳)」 ‘조장(造醬)’의 동인조장법(東人造醬法)에도 나온다. 동인조장법은 당시 조선에서 장을 만드는 법을 소개한 것이다. “대두를 깨끗하게 장만하여 하룻밤 물에 담갔다가 건져내어 노랗게 될 때까지 삶는다. 삶은 콩을 손으로 짓이겨 주먹 크기의 덩어리로 만들어 사이사이에 짚을 넣고 짚둥구미[藁篅]에 담아 더운 데 놓아두면 누런 곰팡이[黃衣]가 핀다. 이때 강한 햇볕에 말려서 도로 따뜻한 데에 두어 저절로 마르게 한다. 이것이 말장이다.”라고 했다.

연원 및 용도

2007년 충청남도 태안군 근흥면 대섬 인근 마도 바다에서 발견된 고려시대 목선 마도 1호선에서 나온 목간에서 말장에 관한 기록이 나왔다. 목간에 의하면, 마도 1호선은 1207년(고려 희종 3) 10월부터 지금의 전라남도 여수 포구에서 물건을 실었다. 물건은 지금의 전라남도 해남·나주·장흥 일대에서 거둬들인 것이었다. 1208년(고려 희종 4) 2월에 배는 여수를 떠나 송도로 향했다. 목간에는 송도로 보냈던 물건의 내용이 적혀 있는데, 그중에 말장이 있었다. 이로 미루어 메주는 매우 오래전부터 중요한 진상품이었음을 알 수 있다.

왕실에서는 가뭄이나 홍수가 발생했을 때 메주를 백성에게 구황 물품의 하나로 제공했다. 메주와 함께 소금을 제공하여 된장을 담가서 끼니를 해결하도록 권장했다. 그런데 메주를 마을의 사람 수에 맞추어 띄워서 진휼을 공급하였으나, 그 양이 부족하여 문제가 되기도 했다(『성종실록』 16년 6월 13일). 진휼품으로 메주 자체를 주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황두(黃豆)를 주어 직접 메주를 띄우도록 했다. 이 과정에서 대상 인원에 맞춘 황두가 부족해지는 일이 발생했다. 그래서 사람 수에 맞추지 말고 필요한 양만큼 넉넉하게 메주를 만들도록 해야 한다는 상소가 올라오기도 했다(『성종실록』 16년 6월 16일).

중종 때는 왕실의 제향(祭享)에 쓰는 메주를 봉상시(奉常寺)에서 직접 만들다가 너무 정결하지 못해서 궁 밖에서 장만하여 바치도록 한 일을 두고 신하들 사이에 논쟁이 붙기도 했다. 궁 밖에서 만들어도 정결치 못하다는 상소가 있었기 때문이다(『중종실록』 10년 11월 2일). 하지만 봉상시에서도 정결하지 못했기 때문에 계속해서 궁 밖에 만들도록 결정했다(『중종실록』 10년 11월 6일). 봉상시에서는 메주 만드는 일을 맡은 구실아치를 잡물색(雜物色) 혹은 말장색(末醬色)이라 불렀다.

왕실에서는 왕자들에게도 메주를 제공하였다. 세종은 양녕대군(讓寧大君)의 사저(私邸)에 술 빚을 쌀과 함께 메주와 탄(炭)을 공급해 주었다(『세종실록』 6년 2월 13일). 가뭄이나 홍수가 난 마을 사람들을 진휼할 때에도 반드시 메주를 제공하였다.

생활·민속적 관련 사항

정학유(丁學游)는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 11월에서 “여자들아 네 할 일이 메주 쑬 일 남았구나. 익게 삶고 매우 찧어 띄워서 재워 두소.”라고 했다. 대두를 수확할 때 메주를 만들어서 띄워 두어야 다음 해 여름에 장을 담글 수 있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규합총서(閨閤叢書)』「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산가요록(山家要錄)』
  • 『산림경제(山林經濟)』
  •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
  •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편저, 『800년 전의 타임캡슐:특별전 태안 마도 수중문화재 발굴성과』, 한국해양문화재연구소, 2010.
  • 한복려 엮음, 『다시 보고 배우는 산가요록』, (사)궁중음식연구원,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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