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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1:18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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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석화 |
한글표제 | 석화 |
한자표제 | 石花 |
대역어 | 굴 |
동의어 | 모려(牡蠣), 모합(牡蛤), 여(蠣), 여합(蠣蛤), 호려(蠔蠣) |
관련어 | 석화막(石花幕), 석화합진말(石花合眞末), 석화탕(石花湯), 석화채(石花菜), 석화해(石花醢) |
분야 | 생활·풍속/식생활/음식 |
유형 | 식재료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주영하 |
생산지 | 동해, 서해, 남해 |
수확시기 | 여름 |
관련 의례 | 왕실 잔치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석화(石花)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명종실록』 7년 12월 25일, 『명종실록』 8년 1월 5일 |
사새목 굴과에 속하는 연체동물의 총칭.
개설
석화는 굴로 불린다. 조선시대에 해안가에 사는 사람들이 쉽게 채취할 수 있었던 조개류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서는 경기도수원도호부와 부평도호부, 충청도의 공주목과 홍주목, 경상도의 진주목, 강원도의 원주목, 함길도의 안변도호부 등지에서 난다고 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서는 강원도를 제외한 모든 도의 해안가 고을 70곳에서 난다고 했다.
원산지 및 유통
한반도의 3면 바닷가에서 채취할 수 있었다. 굴을 캘 때 관아에서 ‘석화막(石花幕)’이란 막을 설치해 주었기 때문에 약간의 세금을 거두었다. 특히 경기도와 황해도에서는 왕실에 진상하는 석화로 인해 백성들의 고통이 많았다. 유통 과정에서 변질된 것이 진상되어 오히려 화를 입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황해도의 진상 양을 줄이라는 명이 내려지기도 하였고(『명종실록』 7년 12월 25일), 어린 석화[小石花]는 진상하지 말라는 명을 내리기도 하였다(『명종실록』 8년 1월 5일).
날것으로 유통할 경우 쉽게 변질되어 문제가 되었다. 심지어 바닷가에서 어민이나 군인들이 날것을 먹다가 식중독에 걸리는 사건이 자주 발생했다. 유통할 때에는 소금에 절인 석화해(石花醢)가 가장 오랫동안 부패하지 않았다고 한다.
연원 및 용도
석화는 석화탕(石花湯)·석화해·석화채(石花菜) 등 다양하게 만들어 먹었다. 날것으로 석화탕을 끓여 먹기도 하였는데, 겨울에 왕의 몸을 보호하는 음식이었다. 또 날것과 채소를 섞어 석화채를 만들어 왕에게 올렸다.
가장 오랫동안 저장하면서 맛을 냈던 음식은 석화해였다. ‘굴젓’인 석화해는 날것을 진상하지 못할 때 왕실에 올렸던 음식이다. 1924년 이용기(李用基)가 펴낸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朝鮮無雙新式料理製法)』에 석화해를 만드는 방법이 나오는데, 먼저 바닷물을 제거하고 독에 담아 굴 1말에 소금 7되를 켜켜이 담아 만들었고, 이때 소금을 적게 넣으면 굴이 형체를 잃어버린다고 하였다. 굴젓으로는 장굴젓[醬石花]·물굴젓[水石花]·어리굴젓[淡石花醢] 등이 있었다.
생활민속 관련사항
석화합진말(石花合眞末)은 석화에 밀가루를 묻힌 것인데, 이것을 종기에 바르면 흰색이 사라지면서 딱지가 떨어졌다고 한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朝鮮無雙新式料理製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