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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1:17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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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건저 |
한글표제 | 건저 |
한자표제 | 乾猪 |
상위어 | 돼지고기[猪] |
관련어 | 건저포(乾猪脯), 생저(生猪) |
분야 | 생활·풍속/식생활/음식 |
유형 | 식재료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김혜숙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건저(乾猪)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세조실록』 5년 9월 6일, 『세종실록』 25년 3월 4일, 『성종실록』 4년 12월 17일 |
말린 돼지고기.
개설
건저(乾猪)는 사육하는 돼지나 멧돼지고기를 생으로 이용하기 어려운 경우에 운반과 저장이 쉽도록 말린 돼지고기이다. 각종 왕실 의례를 거행할 때에 필요한 음식을 만들거나, 특별한 날에 왕이나 왕대비 등에게 진상하는 물품으로 썼다.
원산지 및 유통
조선시대에 돼지는 제사용·접대용 등으로 왕실에서 사육되기도 하였으나, 민간에서 널리 키우는 가축은 아니었다. 대신 사냥한 멧돼지고기를 식용하였다. 건저는 돼지고기가 유통되는 과정에서 상하지 않고 운반하기 편리하도록 말려서 각 지방에서 진상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산 돼지[生猪]를 운반하여 공납하는 데 어려움이 있는 강원도의 경우에 건저로 생저를 대신하도록 한 사례가 있다(『세조실록』 5년 9월 6일).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건저는 경기도·경상도·충청도·전라도·황해도·강원도·함길도의 공물이고, 평안도에서는 건저포(乾猪脯)를 공물로 바쳤다.
연원 및 용도
조선시대에 돼지고기는 왕실이나 민간에서 그다지 즐기는 육고기는 아니었다(『세종실록』 25년 3월 4일). 그러나 궁중의 잔치와 외국에서 온 손님[客人] 접대, 제례(祭禮) 때에 빠뜨리기 어려운 물품이었다. 건저보다는 생저를 선호하였으나, 생저를 충분히 확보하기가 쉽지 않은 경우에는 건저로 대신하였다.
왕이나 왕실 가족 등에게 진상된 물품을 기록한 『천신진상등록(薦新進上謄錄)』에 따르면, 현종대에 건저는 의정부(議政府)와 육조(六曹)에서 1월 1일, 즉 정조(正朝)와 추석, 동지 그리고 왕세자 가례 후의 진하 물선으로서 각각 대전(大殿)에 2마리, 대왕대비전과 왕대비전에 1마리를 진상하였다. 대전에는 현종의 탄신일에도 건저 2마리를 진상하였다. 이때 중궁전에는 올리지 않았는데, 이는 『진상등록(進上謄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건저는 정조, 탄일, 추석, 동지에 대전에만 2마리가 진상되었을 뿐으로 상당히 귀한 물품이었다.
한편 생저를 건저로 대신한 사례로는, 일본이나 유구(琉球) 등에서 온 객인(客人)을 접대할 때에 대육(大肉)이라는 생저를 사축서(司畜署)에서 잡아 썼으나, 돼지가 번식하지 않는 동안에는 건저를 대신 쓰도록 명하였다(『성종실록』 4년 12월 17일).
참고문헌
- 『진상등록(進上謄錄)』
- 『천신진상등록(薦新進上謄錄)』
- 한국고전용어사전 편찬위원회, 『한국고전용어사전』, 세종대왕기념사업회,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