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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1:16 기준 최신판



숭어과에 속하는 바닷물고기를 부르는 한자 이름.

개설

수어(秀魚)는 한글로 숭어라고 적는다. 다른 한자 이름으로는 수어(水魚), 숭어(崇魚), 치어(鯔魚) 등이 있다. 한반도 3면 바다의 모든 곳에서 잡히기 때문에 가장 널리 먹었던 생선이다. 왕실에서는 새로 난 숭어를 12월에 종묘에 천신(薦新) 제물로 올렸다.

숭어는 왕실에서 매우 중요한 식재료였기 때문에 계절마다 진공(進供)되었다. 진공 과정에서 제때에 바쳐지지 않거나, 부패하거나, 개수가 빠지는 등의 문제가 자주 발생하였다. 숭어의 크기까지 규정해 두었기 때문에 이로 인한 분란이 잦았다. 결국 효종대 이후 쌀로 대체하는 방안이 제시되었고, 숙종대 이후부터 어민들은 숭어 값을 쌀로 치르는 방식으로 진공하였다.

왕실에서는 서울 노량진에서 전문적으로 숭어를 잡는 숭어배[秀魚船]를 운영하였다. 계절에 따라 생숭어[生秀魚], 말린 숭어[乾秀魚], 얼린 수어[凍秀魚]의 형태로 유통되었다. 어민들이 직접 숭어알젓[秀魚卵]이나 숭어젓[秀魚醢, 秀魚鮓]을 만들어 유통시키기도 했다. 숭어알젓은 4월의 진공품이었다. 숭어회[秀魚膾]와 숭어구이[秀魚炙]와 같은 음식의 주재료가 되기도 했고, 열구자탕(悅口資湯)이나 고제탕(苽制湯)·어화양적(魚花陽炙) 등의 부재료로 쓰이기도 했다.

원산지 및 유통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숭어는 평안도·황해도·경기도·충청도·전라도의 서해, 전라도와 경상도의 남해, 강원도와 함경도의 동해 등지에서 잡히는 생선이다. 전국의 해안에서 잡히는 까닭에 조선시대에 가장 널리 식용되었다. 숭어는 바다에서만 자라지 않는다. 암컷은 새끼를 배면 음력 3~4월에 산란을 하기 위해 연안의 개펄이나 강 하구의 탁한 물로 이동한다. 이때 명주실로 짠 그물을 바닥까지 내려서 숭어를 잡았다. 새끼는 몸길이가 25㎝ 정도 되는 4월쯤에 얕은 바다로 나간다. 바다에서 자란 숭어는 다시 음력 3~4월에 연안이나 강 하구로 돌아온다.

조선왕실에서 숭어를 좋아하여 사옹원에서 아예 숭어배를 별도로 운영할 정도였다. 그래도 양이 부족하자 한강의 서강에서 활동하던 어부들이 사사로이 숭어를 잡아 판매하는 일도 잦아, 인조 때는 그들의 탈세가 왕실의 논쟁거리가 되기도 했다.

서해와 한강 하구에서 잡힌 숭어 생물을 마포에서 구입하여 어상(魚商)들이 팔고 다녔다. 어상들은 주로 여성이었는데 숭어를 구입하는 사람 역시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음력 3~4월에 숭어 날것을 사서 싱싱하면 회로 먹고, 그렇지 않으면 탕이나 구이, 심지어 숭어살을 만두피로도 이용했다. 전라도에서는 음력 3월에 암컷 숭어를 잡아 배에 가득 찬 알로 어란(魚卵)을 만들어 4월 그믐 안에 왕실에 진상하였다.

숭어는 조선초기부터 진공 문제로 왕실에서 논란거리였다. 특히 경기도 서해의 6군데 포구에서는 사옹원(司饔院)으로부터 한 달 동안에 보름 전후에 1차례, 대일차(大日次) 1차례, 소일차(少日次) 4~5차례를 요구받았다. 대일차와 소일차는 숭어가 많이 잡혔을 때 정해진 양을 진공하고 남은 것을 다시 왕실에 바치는 일을 가리킨다. 그런데 숭어는 어떤 때는 잘 잡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잡히는 곳이 서울과 멀어 상하기가 쉬웠다. 그러니 결국 서울의 경강(京江)에서 1필의 베로 1자의 숭어를 사서 왕실에 바쳤다. 그런 과정에서 경영고(京營庫)에서 간섭을 하고, 싱싱하지 않으면 사옹원에서 거부를 당하기도 했다. 수시로 왕의 주선(晝膳)과 별진(別進)에 쓴다고 아침에 저녁까지 바치라는 명령을 내리는 일도 자주 있었다(『성종실록』 24년 7월 18일). 결국 쌀로 대신하도록 하는 조치가 내려졌다.

효종 때 대동법을 시행하지 않던 전라도에서 흉년이 일어나자, 공물로 바치던 말린 숭어[乾秀魚]에 대한 문제가 생겼다. 몸통이 1자 이상 되는 것은 쌀 10말의 가격이니 쌀 두어 말이면 살 수 있는 1자 이하의 것에 대해서도 어공의 대상으로 삼자는 의견이 나왔다. 마침내 전라도에서도 어민이 직접 말린 숭어를 바치지 않고 쌀로 숭어 값을 지불하도록 조치되었다(『효종실록』 3년 4월 24일).

연원 및 용도

이수광(李睟光)은 『지봉유설(芝峰類說)』에서 숭어를 한자로 ‘수어(秀魚)’라고 적게 된 이유를 밝히고 있다. 중국 사신이 조선에 와서 숭어를 먹고서 이름이 무엇이냐고 묻자 역관(譯官)이 수어(水魚)라고 대답했다. 생선이 모두 수어(水魚)인데 어찌 이런 이름이 붙었냐는 듯 중국 사신이 웃었다. 역관이화종(李和宗)이 물고기 중에서 맛이 가장 좋다고 하여 수어(秀魚)라고 한다고 하자 이해가 되었다. 맛이 ‘빼어난 생선’이었다. 이와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듯이 조선초기에 명나라에 바치는 진상 물품에는 반드시 숭어가 들어갔다. 1429년(세종 11)에 숭어 440마리가 북경으로 보내졌다(『세종실록』 11년 7월 19일). 1478년(성종 9)에 말린 숭어 300마리를 북경에 보냈다(『성종실록』 9년 8월 13일).

왕실에서 숭어를 재료로 하여 가장 많이 만든 음식은 숭어찜[秀魚蒸]이다. 1887년(고종 24) 익종비(翼宗妃)신정왕후(神貞王后)조씨(趙氏)의 팔순을 경축하기 위해 경복궁 만경전에서 1월 27일부터 1월 29일까지 거행한 진찬을 기록한 『[정해]진찬등록([丁亥]進饌謄錄)』에 나오는 숭어찜에는 큰 숭어 3마리와 소등심살[牛內心肉] 10분의 1, 계란 5개, 표고버섯 3석(夕), 석이버석 3석, 간장 3석, 후추 2석, 잣 2석 등이 재료로 쓰였다. 또 얼린 숭어회도 차려졌다. 얼린 큰 숭어 5마리에 간장 5합(合), 식초 3합, 생강 2합, 잣 3합이 재료로 들어갔다. 영조는 숭어나 숭어알젓이 기름이 많아 즐겨먹지 않았다.

『음식디미방[飮食知味方]』에는 ‘슈어 만도’(숭어만두) 조리법이 나온다. “신선한 슈어를 얇게 저미고, 소로 기름지고 연한 고기를 이겨 잘게 두드려 두부, 생강, 후추를 섞어 기름지령에 많이 볶는다. 저민 고기를 싸 단단하게 말아 허리 굽은 만도, 즉 만두 형상으로 만든다.”고 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음식디미방[飮食知味方]』
  • 『[임진]내외진찬등록([壬辰]內外進饌謄錄)』
  • 『[정해]진찬등록([丁亥]進饌謄錄)』
  • 『지봉유설(芝峰類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