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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1:06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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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을사추조지옥 |
한글표제 | 을사추조지옥 |
한자표제 | 乙巳秋曹之獄 |
동의어 | 명례방사건(明禮坊事件) |
분야 | 문화/종교/천주교·기독교 |
유형 | 사건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정조 |
집필자 | 차기진 |
발생시기 | 1785년(정조 9) |
발생장소 | 서울 |
관련 인물/집단 | 김범우(金範禹), 이벽(李檗), 이승훈(李承薰), 권일신(權日身) / 천주교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을사추조지옥(乙巳秋曹之獄) |
1785년(정조 9) 봄, 서울 명례방에서 열린 천주교 신자들의 집회가 발각되어 일어난 옥사. 일명 명례방사건(明禮坊事件).
개설
1784년(정조 8) 겨울 천주교회가 창설된 이듬해 봄 서울 명례방(明禮坊)에 있던 김범우(金範禹)의 집에서 열린 천주교 신자들의 집회가 형조의 금난서리(禁亂胥吏)들에게 적발되었다. 그 결과 여기에 참석했던 초기 교회의 지도층 신자들이 형조로 압송되었다가 석방되고, 집주인 김범우는 충청도 단양으로 유배되어 배소에서 사망하였다.
역사적 배경
천주교회가 창설되기 전부터 기호남인 안에서는 서학(西學)에 대한 토론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반면에 전통 유학자들은 서학을 사학(邪學)으로 여겨 배척했으며, 안정복(安鼎福)은 일부 소장 학자들이 천주교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이를 경계해 오고 있었다. 그러던 중 이벽(李檗)의 부탁을 받고 북경에 간 이승훈(李承薰)이 1784년 초 그곳에서 세례를 받은 뒤 귀국하였고, 같은 해 겨울에는 서울 수표교 인근에 있던 이벽의 집에서 권일신(權日身)과 정약전(丁若銓)·정약용(丁若鏞) 형제가 모여 이승훈의 주도로 첫 세례식을 가짐으로써 천주교회를 창설하였다.
발단
교회 창설 직후부터 첫 세례자들은 집회를 가지면서 가까운 친지들에게 천주교를 전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이들의 집회 장소는 수표교에서 명례방 김범우의 집으로 변경되었는데, 이 명례방 집회가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은 1785년 을사년 봄에 형조의 금난서리들이 그 앞을 지나다가 우연히 집회 사실을 발견하고 그 자리에 있던 신자들을 모두 체포하여 형조로 압송하였다.
경과
당시 형조로 압송된 이들은 이벽과 김범우, 이승훈, 권일신·상학(相學) 부자, 정약전·약용 형제 등이었다. 이때 형조 판서김화진(金華鎭)은 집주인이자 중인 역관인 김범우만을 투옥하고, 양반집 자제들은 모두 훈방하였다. 그러자 권일신은 매제 이윤하(李潤夏)와 아들 권상학 등을 데리고 형조로 가서 압수한 물건들을 돌려 달라고 요구하였고, 중인 최인길(崔仁吉)은 천주교 신자임을 자백하고 투옥되었다가 형벌을 받은 뒤 석방되었다.
이 사건 이후 천주교 신자들은 어려움을 겪지 않으면 안 되었다. 김범우는 형벌을 받은 뒤 충청도 단양으로 유배되어 그곳 배소에서 사망했고, 이승훈은 부친을 따라 천주교를 배척하는 글과 시를 짓고 두문불출하였다. 특히 이벽은 부친의 강요 때문에 신자들과 접촉을 끊고 지내다가 얼마 안 되어 사망하였다.
의의
교회 내적으로 볼 때 을사추조지옥(乙巳秋曹之獄)은 신자들의 활동을 일시적으로 위축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반면에 교회 밖에서는 척사(斥邪)의 공론이 비등해지게 되었고, 기호남인 안에서는 전통 유학을 따르는 안정복 계열과 진보적인 성향 아래 천주교를 가까이하는 권철신(權哲身) 계열로 분파되었다.
참고문헌
- 『벽위편(闢衛編)』
-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 李元淳, 『韓國天主敎會史硏究』, 한국교회사연구소, 1986.
- 趙珖, 『朝鮮後期 天主敎史 硏究』, 高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1988.
- 車基眞, 『조선 후기의 西學과 斥邪論 연구』, 한국교회사연구소, 2002.
- A. Daveluy, 『Vol. 4 : Notes pour l'Histoire des Martyrs de Corée』1859~1860(필사본), 한국교회사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