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범우(金範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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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751년(영조 27)~1786년(정조 10) = 36세]. 조선 후기 정조(正祖) 때의 천주교인이자, 천주교도 중에 첫 번째 희생자. 세례명은 토마스. 자는 정지(正之)이며,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사역원(司譯院) 판관(判官)을 지낸 김의서(金義瑞)이고, 어머니는 남양 홍씨(南陽洪氏)홍억석(洪億錫)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김경흥(金慶興)이며, 증조할아버지는 김익한(金翊漢)이다.

영조~정조 시대 활동

서울 남부 명례방(明禮坊)에서 중인 출신 역관의 아들로 태어난 김범우는 1767년(영조 43) 혼인을 하고 1773년(영조 49) 역과(譯科) 증광시(增廣試)에 합격하여 종6품 한학우어별주부(漢學偶語別主簿)에 올랐다. 그는 이 무렵부터 이벽(李蘗)·이승훈(李承薰) 등의 초기 천주교 신자들과 가깝게 지냈으며, 1784년(정조 8) 이승훈이 북경(北京)에서 천주교 세례를 받고 돌아온 후 수표교 인근 이벽의 집에서 이승훈으로부터 세례를 받아 정식으로 입교하였다.

이후 김범우는 윤지충(尹持忠)·최필공(崔必恭)·김종교(金宗敎)·홍익만(洪翼萬) 등에게 교리를 전하거나 교회 서적을 빌려 주었다.(『정조실록』 15년 11월 7일) 동생들에게도 교리를 전하여 입교시키고, 본인 스스로도 교리를 철저히 실천하였다. 또한 자신의 집을 신자들의 집회소로 제공하여 ‘명례방 공동체’가 탄생하는 계기를 만들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초기 천주교 신자들은 김범우의 집에서 정기적으로 모임을 가졌다.

그러다가 1785년(정조 9) 봄 김범우의 집에서 이벽의 주도로 집회를 갖던 이승훈·정약전(丁若銓)·정약용(丁若鏞)·권일신(權日身)·김범우 등이 형조의 사령들에게 발각되어 형조로 압송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이다. 당시 형조에서는 체포되어 온 대부분이 남인(南人)계 양반 집안 자제라는 것을 알고는 훈방 조치했으나, 집주인이던 중인 김범우만은 투옥하고는 배교를 강요하였다.(『정조실록』 15년 11월 8일),[『사학징의』],[『벽위편』] 그러나 김범우가 끝까지 천주교 신앙을 고집하자 충청도 단양으로 유배형이 언도되었다. 그는 유배지에서도 계속해서 신앙생활을 지속하며 전교를 하다가 형조에서 얻은 상처가 악화되어 1786년(정조 10) 가을부터 1787(정조 11)년 초 사이에 사망하였다.[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상]

참고문헌

  • 『정조실록(正祖實錄)』
  • 『사학징의(邪學懲義)』
  • 이만채, 『벽위편(闢衛編)』
  • 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상, 한국교회사연구소, 1980
  • 한국교회사연구소, 『한국가톨릭대사전』2,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