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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1:05 기준 최신판



1546년(명종 1) 8월 전옥서 소속의 정흥종이 윤원형의 심복인 진복창의 고발로 화를 입은 사건.

개설

정흥종(鄭興宗)은 당시 오행(五行)의 점술에 능한 인물로 알려졌다. 그는 음양서에 유력한 사대부의 사주(四柱)에 태월(胎月)을 포함한 오주(五柱)를 나열하여 쓰거나 자전(慈殿)과 대전(大殿)의 오주를 적어 놓고, 지금까지의 운수인 선분(先分)이 어떻고, 앞으로의 운수인 후분(後分)이 어떠할 것이라는 말을 주변 사람들에게 해 왔다. 정흥종과 동향인 진복창(陳復昌)이 이 말을 듣고 고발하여, 성종의 사위인 의성위(宜城尉)남치원(南致元)과 그의 아들 남기(南沂)가 정흥종과 함께 극형에 처해졌다.

역사적 배경

이 사건은 계속된 옥사를 통해 반대 세력을 제거하여 소윤(小尹)의 정치적 주도권을 확립하는 과정에서 발생하였다.

발단

이 사건은 을사사화의 여파가 계속되는 가운데 발생한 또 하나의 옥사였다(『명종실록』 1년 8월 10일). 소윤 윤원형 일파가 실권을 장악한 가운데, 이 사건을 고발한 진복창은 윤원형의 심복으로 을사사화에서 대윤(大尹) 일파를 탄핵하는 데 크게 활약하여 사관(史官)에게 독사(毒蛇)라고 불린 인물이었다(『명종실록』 1년 8월 12일).

경과

정흥종은 그 후 대사간·공조 참판에까지 올랐으나 자신을 추천한 구수담(具壽聃)을 역적으로 몰아 사사(賜死)하였고, 결국에는 윤원형에게도 간교·음험한 인물로, 그리고 극적(極賊)으로 불리며 배척 받아 유배되었다. 정흥종은 무엇보다도 감히 자전과 대전의 운수를 점쳤다는 사실 때문에 극형에 처해졌다(『명종실록』 1년 8월 13일).

참고문헌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