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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0:58 기준 최신판



외관직 역관을 파견할 수 없는 지역에 사는 현지인으로서, 통역을 담당하고 그 지역의 동향을 수집하던 지방 역관.

개설

향통사(鄕通事)는 조선초부터 평안도·함경도 일대에서 살며 여진인의 동태를 감시하고 국경 너머의 여진 지역까지 들어가서 정세를 파악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명나라로 가는 사신단에 배속되어 연락 관계를 담당하거나 부경사신(赴京使臣)의 귀국 보고 문서를 전달하기도 하였다. 경상도 삼포에서도 현지인을 지정하여 일본인의 미심쩍은 동향을 수집하여 중앙에 보고하게 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향통사는 조선초 지방 제도가 수립되지 못하고 역관 배치가 충분하지 못한 형편에서 현지인을 지정하여 여진인·일본인의 동태를 탐지하여 중앙에 보고하게 한 제도였다. 향통사는 외국어 실력을 제대로 갖추었다고 보기 어렵다. 사역원에서 체계적으로 외국어를 익힌 것이 아니라 현지에 오래도록 살면서 익힌 ‘생활 외국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에게 정규적이면서 국가의 사대교린책을 이해·반영하는 임무를 맡길 수는 없었다.

향통사는 현지인을 지정하여 그 직책이 세습되는 일종의 ‘향직’이었다. 향통사가 있었던 지역은 평안도 의주와 평양, 경상도의 삼포, 함경도의 종성과 회령 등지였다.

조직 및 역할

향통사의 이점이 발휘된 시기는 임진왜란에서 정묘·병자호란 때까지였다. 임진왜란이 소강상태에 접어든 1595년(선조 28)경부터 여진족의 심상치 않은 기세가 보고되었다. 조정에서는 평안도에 역관을 파견하고 정세를 관찰하는 등의 일을 전담하게 하였다. 평안병사→만포첨사(滿浦僉使)→만포 여진학 역관으로 연결된 계통에서 향통사 또는 훈도(訓導)로 지칭되는 역관들이 고정적으로 동향을 파악하였다. 이들 역관들은 여진의 경계로 들어가 정황을 탐지하고 명나라 장수를 따라다니며 돕거나, 도망쳐 나온 중국인들을 통해 여진의 사정을 파악하였다. 정묘호란 이전까지 함경도 만포의 여진학 향통사들은 후금 지역을 넘나들면서 정보를 수집했다. 정묘호란 이후로도 향통사들은 춘신사(春信使)·추신사(秋信使)의 일원으로 참여하였다.

변천

여진학 향통사는 임진왜란이 소강상태에 접어든 1595년경, 조선이 강홍립(姜弘立) 부대를 파병하고 모문룡 부대를 지원하던 때부터 정묘·병자호란이 발발하는 시기까지 활발하게 등장하였다. 조선으로서는 후금 즉, 청나라의 정보를 수집하고 사신을 보내는 것이 초미의 사안이었으므로 현지인 가운데 재목이 될 만한 인물까지 발굴하여 향통사로 기용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1684년(숙종 10)경 오삼계의 난이 완전히 평정되는 시기에 이르러 대청 관계에서의 긴장감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같은 시기에 청학 역관이 담당하였던 만포 역관은 그 규정이 폐지되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통문관지(通文館志)』
  • 백옥경, 「조선전기 역관연구」, 이화여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0.
  • 이상규, 「17세기 왜학역관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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