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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0:50 기준 최신판



조선시대 사역원(司譯院)에서 일본어를 익히던 학생.

내용

왜학생도(倭學生徒)는 태종대에 사역원에서 일본어 교육이 시작되면서 나타나고 있다. 처음에는 11명으로 출발하였으나, 세종대에 27인, 단종대에 39인으로 정원이 증가하였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사역원 15인, 제포(薺浦) 및 부산포(釜山浦)에 각 10인, 염포(鹽浦)에 6인을 두도록 하여 모두 41인이 있었다.

『대전후속록(大典後續錄)』에 의하면 왜학생도의 원래 정원 40인에 10인이 더하여져서 50인이 되었다. 또한『통문관지(通文館志)』에 의하면 『경국대전』 규정 외에 1675년(숙종 1)부터 예차생도 25인을 별도로 정한 것으로 되어있다. 그리고 우어청(偶語廳)에도 1741년(영조 17)부터 왜학 30인이 정액으로 되어있었다. 외방의 경우에는 1671년(현종 12년)에 제주에 왜학생 15인을 둔 것뿐만 아니라, 1707년(숙종 33)부터는 거제에도 5인의 왜학생이 추가되었다.

용례

禮曹上齋郞及倭學生徒事宜(중략) 故以元屬生徒十一名 時在者四名 其入屬他司者及滿百日者 竝令論罪 還屬習業(『태종실록』 18년 5월 3일)

참고문헌

  • 정광, 『조선조 역과(譯科) 시권(試券) 연구』,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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