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어청(偶語廳)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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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우어청 |
한글표제 | 우어청 |
한자표제 | 偶語廳 |
상위어 | 사역원(司譯院) |
관련어 | 우어별차(偶語別差), 한학(漢學), 몽학(蒙學), 여진어(女眞學), 청학(淸學), 왜학(倭學), 압물관(押物官), 체아직(遞兒職) |
분야 | 정치/행정/관청 |
유형 | 집단·기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이상규 |
폐지 시기 | 대한제국기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우어청(偶語廳) |
어리고 재주 있는 자들을 뽑아서 회화체 방식으로 외국어를 가르치도록 한 관서.
개설
‘우어(偶語)’란 서로 마주 보고 대화한다는 뜻이다. 이전에는 외국어를 학습할 때 문어체(文語體) 교재를 배워서 암송하였으나, 17세기 이후로는 이러한 방식에서 벗어나 회화체 교재 위주로 외국어를 익혔다. 나이가 어리고 재주 있는 자들을 뽑아서 가르쳤으며 정원은 100명이었다. 그 안에서 중국어[漢學] 전공이 50명이었고 일본어[倭學]·만주어[淸學] 전공이 각각 20명, 몽골어[蒙學] 전공이 10명이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우어청 방식으로 사역원 생도들의 외국어 학습 방식을 혁신하고자 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가장 큰 이유는, 17세기 내내 4개 전공에 걸쳐 역관들이 통역이 불가능하다는 지적을 수차례 받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전란으로 인하여 교재가 없어진 것도 이유가 되었다. 그렇지만 15세기 문어체 어학 교재의 맹점은, 그 남은 교재로 공부해서 역과에 입격해도, 외교 현장에 필요한 세련되고도 복잡한 통역 현실을 감당할 수 없다는 데 있었다.
우어청은 1682년(숙종 8) 민정중(閔鼎重)이 사역원 도제조로 있을 때 설치되었다. 현종 말과 숙종 즉위 초, 중국에서 일어난 삼번(三藩)의 난 소식이 국내로 알려졌다. 국내에서는 이후 10여 년 동안 명나라 출신 오삼계의 군대가 오랑캐 청나라를 뒤흔들어 줄 것을 기대하였다. 이러한 기대 심리를 기반으로 우어청 방식이 도입되었다. 조정의 비상한 관심은 중국에 파견되는 사신인 연행사(燕行使)를 통해서만이 아니라, 쓰시마를 통해서 일본이 대외적으로 수집한 대륙 정보를 입수하려는 데까지 미쳐 있었다. 대륙의 변란으로 인해 명나라의 유랑민이 조선으로 흘러들어 왔고, 부진한 역관 교육에 이들 명나라 출신 유랑민을 외국어 훈장(訓長)으로 발탁하였다.
조직 및 역할
1682년 사역원에 설치된 우어청에서는 4개 외국어 전공 교육이 실시되었다. 먼저 삼번의 난으로 인해 조선에 흘러들어 온 한인(漢人) 문가상(文可尙), 정선갑(鄭先甲)을 중국어 훈장으로 삼았다. 몽학훈상당상(蒙學訓上堂上)인 서효남(徐孝男)과 송도 사람으로서 청나라에 끌려갔다가 다시 몽골로 붙잡혀 갔던 무과 출신 김효원(金孝源)을 몽골어 훈장으로 삼았다. 왜학훈상당상인 박재흥(朴再興)·안신휘(安愼徽)는 일본어 훈장으로 임명하였고, 만주어 역관 이즙(李濈)과 최후택(崔厚澤)을 만주어 훈장으로 삼았다.
변천
1687년 김수항(金壽恒)이 사역원 도제조로 재직할 때에는 한학 우어청 중에 10명을 떼어서 별체아(別遞兒)로 따로 설치하여 우어청의 교육을 더욱 권장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현지어를 구사할 수 있는 훈장이 사망하고, 외국 사행의 경험이나 국내에서 청나라 칙사·일본의 동래왜관을 응대한 경험이 많은 역관들이 잇달아 사망하였다. 이에 따라 생도들에게 생생한 외국어 학습을 지도할 수 없었고 생도들 역시 외국어 익히는 일에 시들해졌다.
이후 정부는 유명무실해진 우어청을 폐지하려고 했다. 그러다 역관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부분적으로 청사를 정비하고, 생도들에게 연행의 기회를 늘려 주거나 동래·제주·통영의 역관으로 나아갈 자리를 마련해 주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 『역관상언등록(譯官上言謄錄)』
- 『통문관지(通文館志)』
- 小倉進平 著; 河野六郞 補注, 『(增訂補注)朝鮮語學史』, 刀江書院, 1964.
- 이상규, 「17세기 왜학역관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0.
- 이상규, 「17세기 왜학역관의 제도와 활동」, 조선시대사학회 2007년 10월 발표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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