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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0:49 기준 최신판



명·청시대 홍려시(鴻臚寺) 관원으로 각종 국가의례에서 반열을 관장하고, 회동관(會同館) 관원으로 조선사행의 외교 활동에 밀접하게 연관된 예부의 하급관직.

개설

서반은 명·청시대 홍려시와 회동관의 종9품 관원으로 명대에 의례 관장뿐 아니라 중서사인의 업무를 일부 대행하여 황제문서를 작성하거나 전달하여 조선의 대명 관계에서 핵심 역할을 하였으며, 청대에 홍려시와 회동관에 소속되어 조선사행의 외교 활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담당직무

명·청대 국가의례 행사에 있어 백관(百官)의 반차(班次)를 담당하고 황제문서의 작성 및 전달을 통하여 황제의 칙명을 전하는 일을 맡던 관직이었다. 소속은 주로 홍려시였으며, 일부 회동관에 소속되기도 하였다. 정식 직무는 조회(朝會)와 연향(宴饗) 등의 의식에 있어 백관의 반차를 규찰하고 의례 절차를 관장하였다. 또한 중서사인(中書舍人)의 업무를 대행하여 황제문서를 작성하거나 전달하는 임무를 통하여 황제의 명령을 전달하였다. 명대 서반은 홍려시의 종9품 관원으로 『명사』 직관지에 의하면 50명이 존재하였다. 명초에는 종9품으로 16명이 있었다가 홍무 13년에 44명으로 확대되었으며, 건문 시기에 품급(品級)이 승격되었다.

명대 조선사행이 북경에서 정조례(正朝禮)를 비롯한 각종 의례에 참석하면 서반이 이를 관장하였던 점, 서반이 황제문서의 작성 및 전달 업무를 담당하고, 회동관에 서반이 별도로 설치된 점, 조선초기 서반이 중국 사신으로 조선에 파견된 점 등으로 조선사행의 외교 활동과 사신 접대에 밀접한 관련성을 가졌다. 이에 조선은 대명 외교의 통로로 서반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적극적으로 접촉하여 우호적인 관계를 가지고자 하였다. 이는 중요한 외교의 사안별로 중국 관원에게 제공되는 인정물품에 서반은 필수적으로 포함된 점에서 확인되었다. 조·명 관계에서 대표적인 서반으로 세종대 조선 출신으로 네 차례 사신으로 온 최진(崔眞), 성종대 조선사행의 북경 활동에 큰 영향을 준 진지(陳智) 등이 있었다. 세조대 이후 서반은 명나라 사신과는 달리 통사 신분으로 접대를 받았으며, 성종대 이후 서반의 직무 중 조선사행이 접촉하는 점을 중시하여 통사로 주로 인식하였다.

청대의 서반은 황제의 명령 체계에서 제외되고, 조선에 사행으로 파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사행이 북경에 머무는 동안 회동관을 중심으로 접촉하는 것으로 제한되었다.

조중 관계와 관련하여 일부 조선 출신으로 서반을 임명하여 조선사행을 접대하고 관련 업무를 맡기는 경우도 있었다. 명은 서반의 외교적 기능을 활용하여 15세기 조선인이 많이 거주하였던 동녕위(東寧衛) 출신 최진을 서반으로 임명하였으며, 청은 입관 이후 조선 출신을 서반으로 임명하여 대조선 외교 업무를 담당시켰다. 직품은 낮았지만, 조선의 대중국 관계에 외교 창구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통문관지(通文館志)』
  • 『동문휘고(同文彙考)』
  • 김경록, 「조선시대 대중국 외교문서와 외교정보의 수집·보존체계」, 『동북아역사논총』 25, 2009.
  • 김경록, 「조선시대 대중국 외교문서의 접수·보존체계」, 『한국사연구』 136, 2007.
  • 김경록, 「조선시대 사행과 사행기록」, 『한국문화』 38, 2006.
  • 김경록, 「조선초기 통사의 활동과 위상변화」, 『한국학보』 101,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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